『그래서 이 자들은 영원한 벌을(받으러) 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러)갈 것입니다』(마태 25,46).
겨울을 재촉하는 늦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가운데 이미 깊어 버린 가을의 황량한 들판과 떨어져 비에 젖어 흐트러진 낙엽이 뭔가 사람의 마음을 허전하고 쓸쓸하게 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연히 틀어 놓은 「섹스폰」곡 모음의 애절한 가락들이 분위기를 한껏 돋구어 주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교회의 전례주년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그 자체로도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마지막 주일이지만 그때마다 또한 반복해서 지난 1년을 후회하고 똑같은 결심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지금이 불경기라고들 합니다. 하기는 불경기란 어떤 분야든 언제든지 있어왔고 또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 회사마다 무슨 기구 축소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말들이 쉽게 나오고, TV는 30ㆍ40대 퇴직자들의 처절한 구직현장을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TV드라마도 「가을 소나타」나 「아내가 있는 풍경」등 40ㆍ50대의 명예 퇴직자들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봉급 생활자들은 이런 것을 보고 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기도 언제 회사를 그만두게 될 지 불안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명예퇴직이 꼭 불운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군인들이 계급 정년이나 연령 정년에 걸려서 30대나 40대에 제대한 사람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군인들은 40ㆍ50대에 모두 예편을 합니다. 불안했던 마음이야 그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대부분 성공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수능시험을 치른 학생들은 그 결과를 기다리며 약간은 느긋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지원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수험생들이 아직도 해방감에 젖어 들기는 이릅니다. 여전히 많은 학생들은 밤잠을 줄이고 독서실을 찾아야 합니다. 입학시험에 합격 불합격 판정을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심정은 누구나 경험해봐서 다 잘 압니다. 그래서 합격자 발표 현장은 환호와 좌절이 극명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 뿐 아니라 학창생활의 전부도 아님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대학에 떨어졌기 때문에 전화위복이 된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여러가지 마지막을 겪게 됩니다. 무엇이나 시작한 것은 마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역시 연중 마지막 주일도 지나고 나면 새로운 전례주년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중에도 이생에서는 최후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다른 마지막은 재도전의 기회가 있지만 이것만은 재도전의 기회가 없습니다. 생을 마감하는 죽음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운 생의 시작을 믿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내게도 닥칠 마지막이건만 마치 나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양 살아갑니다. 직장을 떠나게 될까봐 불안해하는 회사원 같지도 않고, 대학에 지원해놓은 학생들만큼 조마조마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분위기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면 약간 심란할 정도입니다.
창밖에는 계속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감나무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빠알간 감알만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비를 맞은 감은 더 진한 색깔을 드러내는 듯하고 땅에 떨어진 잎사귀는 우중충한 색깔이 되어 젖은 쓰레기처럼 되었습니다. 내일이라도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나면 주인은 어지럽게 뒹구는 낙엽을 비로 쓸어 불태워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감알은 조심스레 따서 바구니에 담아 집안으로 들여갈 것입니다. 그 감은 먹은 사람의 살과 피가 되어 같은 생명을 누리며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세상을 함께 살고서도 악인과 의인이 갈라지듯이, 한 나무에 달렸던 감과 잎이 갈라지는 순간에 나는 감의 신분이 될지 아니면 낙엽의 신세가 될지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에는 침이 바짝 말라 버렸습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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