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10월말 탄자니아 카라구웨의 챠발리사 르완다 난민촌을 두번째로 다시 찾았을 때 1년 8개월전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던 그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기억은 어려서 경험한 한국전쟁과 겹쳐져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르완다 비극은 금세기에 일어난 세번째의 대량 종족 학살로 시작되었다. 1994년 4월 르완다와 부룬디의 후투족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의문의 추락사고를 당한 이후 르완다의 집전 후투족은 이를 반군 투치족의 소행으로 인정하고 투치족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주일 사이에 1백만명 가까운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투치족 반군이 전격적으로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여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가해 종족인 후투족 2백만명이 투치족의 보복을 피하여 인근 자이레, 부룬디, 탄자니아로 탈출하였다. 이후 수개월간 온 세계의 이목은 르완다에 집중하였다.
챠발리사 난민촌은 탄자니아로 넘어온 1백만명의 난민 중 7만여명을 수용한 비교적 작은 난민촌이었다. 이 난민촌은 탄자니아의 룰렝게 교구 까리따스(한국의 사회복지 위원회와 같은 기구)가 전 세계 가톨릭교회 까리따스의 지원을 받아 직영하는 난민촌이었다.
전형적인 아프리카 초원지대에 설치된 이 난민촌은 르완다 국경에서 40Km 떨어진 탄자니아 내륙에 위치하고 있었다.
난민들은 한 가구당 네평 남짓한 땅에 나무와 풀로 엮은 움집을 세우고 까리따스가 지급한 푸른색의 비닐로 지붕을 덮고 생활하고 있었다. 1만 5천여 채에 달하는 이런 움집이 경사진 초원지대 2Km에 걸쳐 끝없이 세워져 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1백여개에 달하는 국제구호 단체가 경쟁적으로 구호활동을 하고 있었다.
난민들의 입에 맞는 주식인 바나나 대신 외국에서 들여온 옥수수, 콩, 아프리카 수수와 조, 식용유, 소금 등이 배급되었다. 움막 앞에 흙으로 빚어 만든 화덕, 때에 절은 남비 등 난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하루 한끼 식사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르완다 탈출 때 가져온 풀로 엮은 돗자리와 옷가지, 플라스틱 물통, 식기가 재산의 전부였다. 어머니들은 젖먹이 아기를 등에 업고 고만 고만한 아이들을 데리고 끼니를 끓일 나무를 찾아 인근의 언덕을 헤매고 있었다.
수십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식수차가 도착하면 때에 절은 물통을 들고 모여든 난민들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벌어지곤 했었다. 밤이 되면 고지대인 이곳의 한기로 모두가 몸을 움츠리곤 하였다. 임시로 설치된 간이진료소에는 환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매일 수십명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모든 난민들은 고국 르완다에서 일어났던 악몽의 학살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수백명의 국제 구호단체 요원들이 카라구웨 읍내와 난민촌을 오갔으며 이들의 차량으로 길이 항상 붐볐다.
1995년 2월 첫 번째 방문 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이 챠발리사 난민촌을 집중지원 대상으로 정하고 그해와 금년에 미화 80만불(한화 약6억4천만원)을 지원하였다.
금년 두번째의 방문은 그동안의 지원을 평가하고 난민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차기 지원여부를 가름하는 기회였다.
두번째 찾은 난민촌은 1년 8개월동안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르완다 난민들이 그곳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었다.
첫 번째 확인한 큰 변화는 그토록 많았던 구호 단체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떠나가 버린 사실이었다. 카라구웨 읍내에는 그렇게 많던 구호 요원과 구호 차량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매스컴의 초점을 따라 철새처럼 왔다가 모두가 가버린 것이다.
우직한 가톨릭교회 까리따스만이 홀로 그곳에 남아 있었다. 교회만이 이들 난민들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읍내에서 한시간 걸려 난민촌에 도착하였을 때 새로운 난민촌을 발견하였다. 그 당시 계획중이던 제2난민촌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이 제2난민촌은 탄자니아 국내 구호기관이 운영하고 있으나 운영이 부실하여 UNHCR은 까리따스가 인수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탄자니아 룰렝게 교구 까리따스가 운영하는 제1난민촌에도 많은 변화가 눈에 띄었다. 우선 난민 숫자가 4만 5천명으로 줄었다. 나머지 난민은 제2난민촌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무질서했던 난민들의 움집이 질서 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질서가 자리 잡았다. 지난번 방문시 만났던 교구 까리따스 책임자 시몬 타아부 신부는 부임초와는 달리 자신감에 차 있었고 덥석부리 난민촌 소장 응게마라씨는 여전히 묵묵하게 난민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응게마라씨는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그는 탁월한 능력으로 챠발리사 난민촌을 궤도에 올려놓아 르완다 난민촌 중 가장 모범적인 난민촌을 일구어낸 장본인이다.
그는 만나자마자 지난번 받았던 인삼 선물이 고마웠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난민촌 운영에 난민 대표를 참여시켜 이들이 스스로 질서를 잡아가도록 한 민주적인 운영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간단히 설명하였다.
난민촌 운영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힘든 일이 식량배급인데 그는 난민촌을 14개 지역으로 나누고 이를 구역과 반으로 조직하여 공동 배급체제를 만들어 단 하루에 배급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이 방법은 인근 다른 난민촌에서도 현재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두번째 힘든일은 식수 공급인데 10Km 떨어진 곳에 수원지를 개발하여 대형 집수 탱크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난민촌까지는 대형 급수 차량으로 물을 나르고 난민촌에 대형 물탱크를 만든 후 이를 파이프로 연결하여 여러 곳에서 급수를 하도록 하였다.
환자들을 위한 진료소도 두곳으로 확장하였고 외래환자, 입원환자를 구분시키고 입원환자도 남과 여, 어린이로 별도 병동을 만들었다. 물론 진료소는 대형 비닐텐트로 만든 보잘 것 없는 시설이었지만 난민촌 수준에는 만족할 수 밖에 없어 보였다. 환자들은 주로 고열과 설사, 천식, 피부병을 앓고 있었고 출산율이 높아져 임산부를 위한 조산소도 갖추어져 있었다. 전보다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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