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8일 그리고 1996년12월8일!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55년의 시간이 흘렀다. 전쟁의 시작과 함께 전국적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교회탄압이 자행되었다. 단지 외국인 선교사라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그 외국인 선교사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ㆍ감금당하였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이 당한 고통은 박해시대의 증거들이 받은 고통이었고, 그들의 삶은 순교자들의 삶이었다. 55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 그 시대를 겪고 그 시대를 회고하는 김근배씨의 증언은 오늘의 신자들에게 교회와 민족을 다시 한 번 마음깊이 생각하게 한다.
1929년부터 극심해진 경제공황으로 일본제국주의는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1941년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1941년 12월8일,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발발한 후 미국과 호주 국적의 신부들을 일본의 적성국(敵性國) 국민으로 분류하여 추방하였다. 아일랜드 국적의 신부들은 준(準)적성국 국민으로 분류하여 추방은 하지 않았으나 유치장에 감금하였다. 또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신자들도 체포, 구금하였다.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외국인 신부 3명과 30여 명의 신자들이 육해군형법(陸海軍刑法) 위반 및 불경죄(不敬罪)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고문을 당하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제주도를 중국 폭격기지로 이용하였다. 모슬포에 비행장을 마련하여 공군기지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외국인 및 외국인들과 관계있는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와 규제를 강화하였다.
패트릭 도슨(Patrick Dawson, 孫 : 제주 천주교회)ㆍ오스틴 스위니(Austin Sweeney, 徐 : 서홍리 천주교회)ㆍ토마스 다니엘 라이언(Thomas Daniel Ryan, 羅 : 서귀포 천주교회) 신부 등 3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3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본보 1993년 8월22일자).
이 중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신자들은 다음과 같다. 강군평(康君平), 강붕해(姜鵬海), 고순지(高順芝, 콘첸사), 고옥자, 김근배(金根培, 도미니코), 김갑배(金甲培), 김남구(멜키올), 김남식(金南植), 김중현(金仲鉉), 당덕윤(요셉), 변태우(邊太祐), 윤기옥(尹奇玉), 이기순(李基淳), 이응범(李應範), 하성구(河成九), 허승천, 허봉학(許鳳鶴).
이들의 이름은 소화(昭和) 17년(1942) 형공합(刑公合) 제43-2호 형사재판서(刑事裁判書), 강용삼(姜龍三). 이경수(李京洙)가 편저(編著)한「대하실록 제주백년」(大河實錄 濟州百年), 김근배 씨의 증언(1996년11월22일, 김포군 김포읍), 고순지씨의 증언(1996년 11월24일, 제주 성심약국, 전화 인터뷰)에 의해 밝힐 수 있었다. 이 중 강군평, 강붕해, 김남식, 김중현, 변태우, 윤기옥, 이응범, 하성구, 허봉학 등 9명이 1942년 10월24일 광주지방법원(조선총독부 검사 : 依田克已)에서 징역 및 금고의 형을 선고받았다.
◆ 사상범으로 체포된 신자들
체포된 3명의 신부들을 비롯하여 30여명의 신자들은「사상범(思想范)」으로 분류되었다. 제주 경찰서에 약 4개월동안 미결수로 감금되어 있었는데, 매일 밤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강붕해씨와 김근배씨의 증언은 당시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말해준다. 1941년 12월9일, 그날은 김근배씨 친구의 결혼식 날이었다. 결혼식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던 김근배씨에게 2명의 형사가 찾아와 경찰서장이 보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경찰서가 아니라 김근배씨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또 다른 2명의 형사가 형님(김갑배)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4명의 형사와 경찰서로 향한 김근배ㆍ김갑배 형제는「고등계」라고 쓰여진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스위니 신부와 10여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당시 제주 경찰서에는 1호부터 8호까지 8개의 감방이 있었다. 1호와 2호 감방은 잡범들이 수감되는 곳이었고, 나머지 6개 감방에 사상범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수감되었다. 신부들은 한 감방에 혼자씩 수감되었고, 신자들은 한 감방에 5~6명씩 수감되었다.
◆ 계속되는 고문
수감된 지 약 일주일 만에 불려나간 김근배씨는 취조실에서 조선인 형사와 일본인 형사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했느냐 안했느냐?』
『천주가 높으냐, 천황이 높으냐?』
『신부가 뭐라고 하더냐?』
『신부 방 천정에 안테나가 있던데 누가 만들었느냐? 천장을 찢으니 그 속에서 안테나가 나왔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김근배씨가 사제관에 설치한 라디오는 단파였으므로 천장에 안테나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에 4~5시간씩 취조를 당했고 이어 고문을 당했다. 담뱃불이나 불에 달군 인두로 온 몸을 지져댔고, 펜치로 손톱을 잡아 위로 꺾어 올렸다. 널판지에 눕혀 고개를 젖히고 코 밑에 모포를 두른 후 고춧가루를 섞은 물을 얼굴에 계속 부어댔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코 속으로 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보자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대면 코 밑 부분의 살들이 헤지고 피가 흘렀다.
또한 두 팔을 등 뒤로 묶은 후 비행기를 태운다며 천장에 매달았다. 그러면 어깨뼈가 부서지는 극심한 고통이 온 몸을 휘감았다. 세워놓고 목검으로 머리와 어깨를 마구 쳤으며, 못을 박은 널판 위에 꿇어앉게 한 후 참배하게 하였다.
◆ 1942년 광주 지방법원 형공합(刑公合) 제43-2호
고순지씨와 김근배씨의 증언에 의하면 1942년3월, 제주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천주교 신자들 중 고순지씨와 고옥자씨 등 5명의 여자신자들, 그리고 김갑배씨는 풀려났다. 그 외의 신자들은 광주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배편을 이용하여 목포에 도착, 광주행 열차를 타고 광주 형무소로 향했다. 흉번 225를 받은 김근배씨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목으로 수감된 목사와 헌병을 때린 죄목으로 수감된 사람 등 2명이 있는 감방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김근배씨는 허승천씨와 함께 미결수로 석방되었다.
이들이 풀려난 후 10월 28일, 3명의 선교사와 9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일제가 제주도에서 3명의 외국인 선교사 및 외국인 선교사들과 친밀한 관계의 신자들을 체포, 구금, 판결한 것은 외국인을 조선에서 추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판결문에 제시된 자료는 상당 부분 날조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판결문을 서로 비교해보면 동일한 내용을 관련된 사람의 판결문에서 찾을 수 없다.
또한 도슨 신부의 판결문을 보면『1939년 가을, 도슨 신부가 제주 천주교회 사제관에서「신문과 라디오 방송은 항상 자국(自國)의 전과(戰果)를 과장 보도한다. 일본도 상당히 손해를 보고 있을텐데 자국의 손해를 발표하지 않고 중국군의 손해만을 보도한다」고 말하여 육해군형법을 위반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도슨 신부가 사제관에 라디오를 설치한 것은, 김근배씨의 증언에 의하면 1940년 가을이었다. 따라서 위 내용은 이 사건이 일제의 조작임을 잘 보여준다.
도슨 신부는 육해군형법 위반 및 불경죄의 죄목으로 징역 2년 6월, 스위니 신부와 라이언 신부는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각 금고(禁錮) 2년을 선고받았다. 선교사들에게 씌워진 육해군형법 위반 사항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일본의 공군은 중국 비행기를 많이 격추시켰다는데 거의 허위보도이다』,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미국과 전쟁을 할 경우 패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천주교가 천황보다 위대하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불경죄를 범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선교사들과 함께 체포된 신자들 중 강군평씨는 66세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 10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강붕해씨는 28세로 잡화상 및「경성일보」(京城日報)와「매일신보」(每日新報)분국(分國)을 경영하고 있었다. 육군형법 위반으로 금고 10월,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김남식씨는 24세였고 세탁업을 하고 있었다.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 6월을 선고받았다. 해남군 산이면 노송리(海南郡 山二面老松里)에서 태어나 제주도로 이사한 그는 라이언 신부의 식복사를 하였다. 라이언 신부와『중일전쟁에 영미(英美) 양 강국이 일본과 교전한다면 일본은 패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죄목이었다. 김중현씨는 29세로 미싱상(商)을 하고 있었다.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 10월, 국방보안법 및 군기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변태우씨는 43세로 모슬포의 회장이었고,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국방보안법 및 군기보호법 위반으로 징역1년을 선고받았다. 도슨 신부로부터 모슬포 해군비행장의 넓이, 군인수, 비행기 수 등을 질문받고『비행장의 넓이는 20만평이며 현재도 몇 대의 비행기가 있다. 남경 함락당시에는 매일 두 차례씩 1회20기 정도의 비행기가 도양(渡洋) 폭격하기 위해 왕복했다. 그때는 군인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약간명의 군인이 있는 것 같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우연히 알게 된 군사성의 비밀을 타인에게 누설했다는 죄목이었다. 이발소 직원이었던 윤기옥씨는 당시32세였으며, 육해군형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1940년부터 제주천주교회의 전교회장으로 활동했던 이응범씨는 당시 42세였다.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나주(羅州)에서 태어나 18세에 천주교에 입교한 그는 계량천주교회(현 나주 노안본당)의 전교회장으로 전남의 여러 지역에 전교하였다. 제주천주교회의 회장이었던 하성구씨는 50세로 인부감독을 하고 있었다.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 6월, 국방보안법 및 군기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도슨 신부의 식복사를 한 적이 있었던 허봉학씨는 25세로 미싱판매점 점원이었다. 해군형법 위반, 불경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 계속되는 감시의 눈길
광주 형무소로 이송되지 않고 풀려난 신자들, 미결수로 풀려난 신자들, 실형을 살고 풀려난 신자들, 모두가 고통 속의 삶을 살아야 했다. 「371」이라는 수인번호를 받고 제23호 감방에 수감된 강붕해씨는 형기 종료를 두달 앞둔 1945년 4월 출감하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고등계 형사가 일주일에 한두번 정기적으로 찾아와 동정을 살피고, 가까운 거리의 여행도 제한했다. 또한 1945년 5월, 관동군 시설이 부족하다며 무장군인 7명을 파견하였다. 강붕해씨는 날마다 이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 살얼음판을 딛는 생활을 하였다. 다른 신자들 역시 출감한 후에도 형사들의 감시 때문에 어려운 시간들을 겪어야 했다.
1993년 8월15일 강붕해ㆍ김중현ㆍ이응범ㆍ하성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강군평ㆍ김남식ㆍ변태우ㆍ윤기옥에게는 건국포장이 각각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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