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교우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유일한 목자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약속이나 한 것과 같이 함구하였다. 그러므로 박해자들은 주문모 신부의 종적과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한 갖은 회유와 간교한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위로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포졸과 사령들을 닥달하였고, 그럴수록 형리들의 형벌은 잔악해져만 갔다.
포도청과 형조의 옥에는 주신부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교우들이 하나 둘 늘어만 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주문모 신부와 가까이 지내던 교우들이 체포되었는데, 그중에는 홍필주(洪弼周ㆍ필립보)라는 젊은이가 끼어 있었다. 그는 최초의 여회장으로 유명한 강완숙(골롬바)의 아들로 1790년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처음 교리를 배웠으며, 1791년의 박해 후에는 고향 덕산을 떠나 서울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골롬바는 그의 친어머니가 아니라 계모였지만, 자신에게 진리를 가르쳐 인도하였고 그도 이미 모친의 열심한 덕행을 모범으로 삼고 있었다. 이에 필립보는 부친이 천주교를 봉행한다고 하여 모친을 쫓아내자 할머니와 모친과 함께 신앙을 지켜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상경하였을 당시 필립보는 나이는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직 교회 일에 참여할 수가 없었지만, 1795년 5월 이후 주문모 신부가 남대문 안에 있던 자신의 집에 숨어지내게 되면서 그의 복사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었다. 특히 자신의 집이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교우들이 드나들게 되자, 모친과 상의 한뒤에 집을 창동(倉洞)ㆍ사동(寺洞)ㆍ훈동(勳洞)으로 여러 차례 옮김으로써 신부와 교우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황사영(알렉산델), 최인철(이냐시오) 등과 교류하면서 신심을 쌓아가게 되었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된 2월 24일(양력 4월 6일), 포졸들이 필립보의 집으로 들이닥쳐 골롬바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을 체포하였다. 조선 시대의 관습으로는 양반 부녀자가 주인으로 있는 집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이것마저도 무시된 것이다. 이때 모친과 함께 포도청으로 압송된 필립보는, 처음에는 신부의 거처와 동안의 행위를 말하지 않다가 형벌과 문초가 계속되면서 차츰 마음이 약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영웅적인 모범을 보인 모친의 격려를 받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그 무렵 필립보는 한 명의 동료를 얻게 되었으니,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던 1784년에 입교한 김종교(金宗敎ㆍ프란치스코)였다. 일명「치회」라고 불리던 그는 가난한 의원 집안 출신으로 드러나게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교리 공부에 있어서만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다가 1791년의 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하고 석방된 뒤에는 자신의 나약함을 스스로 책망하면서 더욱 열심히 본분을 지키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에 다시 박해가 일어나면서 여전히 천주교를 봉행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형벌이 시작되자 겁이 나서 교우들을 밀고할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주님의 용기로 힘을 얻고는 이내 형리들에게 교리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또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포도청에서 한 약한 말을 취소하고 자신이 믿는 진리를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였으며, 그런 다음 옥중에서 필립보를 만나 서로를 격려하면서 이전의 잘못을 순교로 보답하자고 다짐하였다. 이제 그들의 마음을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판결일이 거의 다된 어느 날, 필립보는 천상에서 손짓하는 모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꿈이었지만 너무도 생생하여 동료인 프란치스코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고, 교리의 가르침대로 천상 영복(永福)을 얻자고 함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8월 27일(양력10월 4일) 형조 판서 앞으로 나가 마지막 문초를 받은 뒤 사형 판결을 받고는 천상의 즐거움을 노래하면서 서소문 밖으로 나가 순교하였으니, 당시 프란치코의 나이는 48세요 필립보의 나이는 2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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