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은 유엔이 정한 빈곤퇴치의 해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세밑, 본보는 빈곤퇴치의 해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현재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빈민위원회가「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이란 대명제 아래 실시하고 있는 도시공소를 찾아보았다.
본보는 중산층화, 대형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가난한 복음정신을 사목과 연결시켜 실시되고 있는 빈민위의 공소사목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자한다. 그리고 밝아오는 새해에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교회, 우리 자신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있는 교회의 현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 강북구 미아 1동 달동네, 속칭 삼양동이라 불리우는 이 마을 비탈길을 한참 오른 뒤 돌아 본 서울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빌딩과 그 사이로 다니는 자동차 불빛 등 불야성을 이룬 서울 하늘 아래는 가난한 사람도 없는 아름다운 도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삼양동 달동네 꼭대기에 마련된 서울대교구 도시공소를 찾아오는 길에는 부서진 담벼락과 울긋불긋 써있는 글귀 등 가난에 찌든 분위기다. 어디 한 곳에도 아름다운 서울로 보이지 않았다. 이미 떠나 버려 텅빈 집과 갈곳이 없어 그대로 눌러 앉아있는 사람들이 사는 집이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는 마을이다.
곧 철거될 이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마련된 서울대교구 빈민위원회 북부공소가 위치하고 있다. 앞뒷집이 모두 부숴지고, 텅비어 더욱 썰렁한 북부공소는 조금은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다. 아름다운 서울 야경을 뒤로 한 채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10평 남짓한 달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이였다. 물이 새는 지붕으로 천정이 뚫어져 있고, 좁디 좁은 방안은 차디 차가왔다.
들어서자마자 같이 온 한 자매가 다락문을 열어 주었다. 조그만 다락문을 통해 내 눈에 들어 온것은 감실이었다. 이 산꼭대기에서 가장 높은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예수님이 계셨다. 창틀이 부서져 휑한 바람이 들이닥치고 있는 다락에 계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북부공소가 존재하는 이유가 전해져왔다.
여기가 빈민사목위원회 이기우 신부가 기거하는 북부공소「솔샘 공동체」.
지난 91년 서울에 처음으로 도시빈민을 위한 공소로 문을 연「솔샘 공동체」에 이날은 복음화위원회 모임과 정기미사가 있는 날이다.
오후 7시가 되자 미아 1동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 7시30분부터 복음화 7단계에 의한 복음나누기가 시작됐다.
한 명의 사회로 자율적으로 성서를 읽고, 느낌을 나누고, 생활반성과 실천사항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모두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활동가들이다. 애기방, 놀이방을 통해 주민들을 만나고 있는 이들 역시 가난한 이들임에 틀림없다.
어떤이는 이날 읽은 복음 중「빼앗으려고 한다」라는 귀절이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고 얘기하고 또 다른 이는「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왔다」가 마음에 든다고 하며 크게 소리내어 세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이기우 신부 역시 이들과 똑같이 복음나누기에 열중하고 있다.
「빼앗으려고 한다」라는 성서귀절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이는 곧『조금 일찍 와서 공소 앞에 앉아 주위를 보니 모두 빈집 투성이였다』며『우리 마을에 점점 비어가는 집이 늘수록 마음속도 왠지 텅비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그는『누군가 우리의 삶의 자리, 삶의 터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말하면서도『더욱 힘든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고자 했던 내가 오히려 그들에게서 그 무엇을 빼앗는 기득권자가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그의 모습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가난을 선택한 이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라는 짐작이 충분히 가능했다.
이날따라, 외부에서 온 손님들이 많았다. 종신허원을 앞두고 빈민체험을 온 아줌마(?)수녀님들. 사복을 입고 공장에 나가 일하다가 애가 아파서 일찍 퇴근해야겠다고 둘러대고 달려온 이들과 지역 활동가들이 이기우 신부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복음나누기를 하는 모습속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성령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진솔한 분위기의 복음나누기가 날 때, 일용 노동자로 보이는 이들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대부분 세입자 주민들이라는 이들이 모이자, 조그만 방은 더욱 비좁아보였다. 매주 목요일 저녁 9시에 시작하는 주민과 함께 하는 미사가 곧 봉헌됐다.
이들 중에는 예비자도 끼어있었다. 이기우 신부에게 매주 토요일 2시간씩 교리수업을 받고 있는 이들은 오는 성탄에 선발예식을 하게된다.
철거문제로 한참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지역에서 애기방 실무자인 골롬바씨도『무언가 지역 주민들에게 활력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며『애기방 성탄축제를 주민들과 함께 마련코자하니 많은 참석부탁한다』는 공지사항을 잊지 않았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30분 복음나누기, 9시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북부공소는 이 시간을 통해 주민들에게 재개발에 대한 교육은 물론 지역문제 현안에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함께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삶을 반성하고,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다짐을 하기도 하는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상주하는 사제가 있지만 어느 누구도 강제로 이 모임을 이끄는 이는 없다. 서로의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됐을 때 서로의 힘과 지혜를 하느님 앞에서 모아내는 역할을 이 공소는 하고 있다.
외부세력과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싸움에서부터 동네잔치, 아이들 교육문제, 신앙문제 등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가 바로 복음나누기와 미사시간에 나누어지고, 힘이 모아진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란 사목지침을 갖고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빈민사목위원회는 북부공소에 이어 현재 관악구 봉천3동 지역에 남부도시공소인「낮은 자리」와 동부도시공소인 행당동「생명의 터」그리고 서부도시공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도시공소는 해당 지역의 특성을 살리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에게 우선 올바른 신앙을 나누고 배울 수 있는 장을 제공하고, 지역 현안 문제들과 지역본당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빈곤 퇴치의 해」인 1996년이 저무는 시점에서 우리교회와 사회는 올 한해동안 이 사회에서 빈곤 퇴치를 위해 얼마만큼 노력을 해왔는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서울을 밤하늘 아래, 아직도 절대빈곤에 시달리며 사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로부터 빈곤을 몰아내기 위해 가난한 이들 속에서 함께 뒹굴며 살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의 힘과 용기를 보태는 것이「96 빈곤퇴치의 해」를 보내는 우리 모두의 선택이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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