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은 가장 필요한 곳에서 가장 낮은 자로서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한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의 발자취를 3주에 걸쳐 따라가 본다.
■ 과달루페회 두 번째 선교지 ‘한국’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총장 에스칼란테 주교는 첫 번째 선교지로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두 번째 선교지로 1961년 10월 한국을 선정했다. 선교사가 사제 20명에 불과했던 선교회의 결정은 큰 결심일 수밖에 없었다. 부산교구 최재선 주교의 요청으로 이뤄진 한국 선교에 과달루페회는 안요셉, 강요셉 등 두 명의 사제를 파견했다. 그들은 1962년 이억 만 리 한국에 도착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환경도 낯설기만 한 미지의 땅을 찾아온 그들을 부산교구 사제, 신자들은 따뜻한 환대로 맞았다. 덕분에 선교사들은 낯선 곳에 대한 어색함도 잊고 선교사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부산생활은 길지 않았다. 선교회는 1963년 가을 안 신부와 강 신부를 광주대교구에 다시 파견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만난 광주대교구장 헨리 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선교회 총장 에스칼란테 주교는 선교사 파견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부산의 협조 아래 생활하던 두 선교사는 선교 무대를 광주로 옮겼다. 안 신부는 여수 서교동 본당 보좌로, 장 신부는 여수 동소동 본당 보좌로 임명됐다. 이곳에서 세례성사를 통해 본격적인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
▲ 1차, 2차 선교단(1964년)
▲ 에스칼란테 주교와 강요셉 신부(1964년)
■ 한국적인 사목의 멕시코 사제들
과달루페회 선교 사제들은 한국 신자들이 가톨릭교회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한국적’인 사목을 강조했다. 주교회의에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한 스테파노 신부가 한국식 미사를 봉헌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또한 선교회는 멕시코 현지 신학생들도 한국으로 파견했다. 신학생들은 서울 가톨릭대와 광주 대건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 토착화된 사목을 펼치고자 했다. 당시 한국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헌신적으로 사목을 수행했다. 선교사들이 세운 두 번째 성당인 광주대교구 순천 조곡동성당도 성전, 교리, 회합실, 사제관과 사무실, 혼배실 등을 하나의 건물에 갖춘,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설계방식으로 건설했다.
선교사들은 경제적 능력과 신앙적 성숙도, 신자 수 등 자급자족이 가능한 모든 본당은 지역 주교에게 양도할 필요성을 느끼고, 보성본당을 광주대교구에 인계했다. 1975년에는 윤공희 대주교와 새로운 선교 계약을 하면서 곡성, 서교동, 조곡동, 지전동본당을 양도하기로 하고, 매곡동, 구례, 벌교, 고흥, 광양, 소록도본당에서는 사목을 계속하기로 했다. 한 해 앞선 1974년에는 다른 교구에서 선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 위해 노요셉 신부는 부산교구와 계약을 하고 양산본당에서 5년여 동안 활동하며, 한국교회에서의 선교를 확대해 나갔다.
▲ 5월 매곡동성당(197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