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루페 성모 마리아의 발현과 스페인 선교사들을 통해 신앙을 얻은 멕시코 신자들은 이에 대해 보답하고자 했다. 스페인 침략 시대부터 여러 수도회에서 수많은 멕시코 출신 신부와 수사, 수녀들이 여러 선교지에서 활동했지만 공식적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선교단체는 없었다. 교회는 선교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로마에서 유학하던 신학생들과 사제들은 멕시코교회에 외방선교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전국 주교들에게 건의했다. 이때 마르케스 대주교와 미란다 주교는 힘을 모아 월간지 ‘선교’를 만들어 보급하며, 선교 사제 파견에 대한 인식을 신자들에게 심어줬다. 하지만 반대가 많았다. 나라의 재정이 넉넉지 못하고, 박해시대(1926~1936)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도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에서도 사목할 사제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회에 대한 찬성 의견이 우세했기에 주교회의는 1942년 과달라하라에서 제1차 전국 선교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선교대회를 통해 멕시코교회는 외방선교회 설립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제2차 전국 선교대회에서 멕시코 외방선교회와 신학교 설립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1948년 교황 비오 12세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을 통해 외방선교회의 신학교 설립을 인준하고 선교사 교육을 메리놀 외방선교회에 맡겼다. 신학교 학장으로는 멕시코인 메리놀회 회원이었던 에스칼란테(Alonso Manuel Escalante) 주교를 임명했다.
1949년 10월 7일에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설립식이 거행됐다. 과달루페 대성전에서 멕시코 주교단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된 설립식에서는 열두 명의 신학생들이 회원으로 선서했다. 이들은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비그리스도교 지역에서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하기로 맹세하고, 외방선교회 이름을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라고 명했다. 또한 1950년 ‘알마스’라는 공식 소식지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1953녀 교황청 포교성성은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의 회칙을 인준하고 교황 관할권으로 승격시켰다. 더불어 에스칼란테 주교에게 외방선교회의 초대 총장직을 맡겼다.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중국 만주 지역에서 약 10년 동안 활동했던 에스칼란테 주교의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 선교회의 신학생들은 사제품을 받기 시작하면서 일본에 선교 사제로 파견됐다. 이어 두 번째 선교지로 한국이 정해졌으며, 1965년 아프리카 케냐, 1974년 홍콩, 1980년 앙골라와 페루, 1987년 브라질, 1995년 쿠바 등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현재 180여 명의 회원이 과달루페회에 소속돼 있으며, 90여 명이 선교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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