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네!” 하고 응답한 사람들. 한평생을 주님을 위해 봉헌하고자 모인 사람들. 누구나 사제를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사제로 성별되지는 않는다. 신학교에서의 수련을 통해 새로 나야만 사제가 될 수 있다. 성소주일을 맞아 사제로서 새로 태어나기 위해 몸과 마음과 영혼을 수련해나가는 이들이 모인 곳. 성소의 못자리, 수원가톨릭대학교의 하루를 따라가 봤다.
06:00
나무에 맺힌 꽃망울들이 봄의 기운을 물씬 전해주고 있건만 산속 신학교의 새벽 공기는 제법 차갑다. 수단을 차려입은 신학생이 시계를 본다. 오전 6시 정각. 손에 쥔 종을 힘껏 흔든다. 간밤의 긴 침묵을 깨고 신학교에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댕댕-. 댕댕-.
“Benedicamus Domino(주님을 찬미합시다)”
“Deo Gratias(하느님 감사합니다)”
종을 친 신학생이 입을 열어 엄숙한 목소리로 외치자 신학생들이 방에서 화답한다. 달랐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가 아니었다. 신학교의 아침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로 시작했다. 수단과 검은 정장으로 깨끗하게 차려입은 신학생들이 대성전에 모여든다. 아침기도시간. ‘라(A)’의 청명한 음이 퍼져 나간다. 260여 명의 신학생들이 그레고리안 성법에 따라 화음을 넣어 기도하는 성무일도는 흡사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장엄함마저 느껴졌다. 아침기도에 이어 봉헌되는 미사는 평소 접하는 미사와는 무게감이 달랐다. 신학교의 아침은 경건함 그 자체였다.
“국민체조 시~작! 하나, 둘, 셋, 넷!”
미사가 끝나면 신학교 마당에서 경쾌한 리듬에 맞춰 신학생들이 함께 체조한다. 정장을 입고, 수단을 입은 채 체조하는 모습이 다소 생소하지만 아침 식사 전 체조는 신학생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기도로써 마음과 영혼을 깨운 신학생들은 체조와 식사를 통해 몸을 깨운다.
신학생들은 식사시간을 통해 일치를 몸에 익힌다. 함께 기도로 시작해, 함께 기도로 마친다. 모든 신학생이 모이는 이 식사시간은 휴대전화를 지닐 수 없는 신학생들에겐 유용한 소통의 시간이다. 많은 연락사항이 이 자리에서 오간다. 앉는 자리도 학년을 섞어 주기적으로 바꾸며 식사시간을 통해 여러 선배, 후배, 동기들을 만난다. 고요함이 흐르는 신학교에서도 이 시간만큼은 왁자지껄 활기가 넘친다.
09:00
이제 정신을 깨울 시간이다. 신학생들은 각자 자기 학년의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듣는다. 강의를 듣고, 세미나를 하고, 수업을 듣고 의견을 발표하는 모습에 언뜻 강의내용 이외에는 일반 대학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공강(空講)의 모습은 다르다. 여느 대학생들이라면 수업이 비는 공강에는 친구들과 놀러 가거나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지기도 하겠지만, 신학생들에게 공강은 그저 보내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황금과도 같은 시간이다. 신학생들이 과제나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이 공강을 적절히 활용해야만 한다.
신학생들에겐 자유시간이라고 불릴만한 시간이 거의 없다. 모든 생활을 정해진 일과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일반 대학생들에게는 과제를 위해, 시험공부를 위해 밤새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신학생들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일과에 외부인의 눈에는 도저히 개인시간이라고는 보이지 않지만 이미 이런 일과에 익숙해진 신학생들은 자투리 시간 활용에 능숙하다. 처음엔 과제와 공부에 모든 시간이 다 소비되지만, 시간활용이 몸에 밸수록 오히려 여유가 생겨 악기나 사진을 배우고 봉사를 하는 동아리 활동도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신학생들은 엄격한 일과 속에 시간관리 능력을 기르면서 늘 준비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노력과 과정을 통해 안정되고 강인하고 자유로운 사람, 목자로서 책임을 능히 짊어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신학생들은 교회가 필요로 할 때, 교회의 부름을 받았을 때 언제든지 응답해 나갈 수 있는 준비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단련된다.
체력단련과 노동도 신학생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학년별로 정해진 이 일과 역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예외 없이 학년공동체가 함께한다. 신학교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노동은 신학생들의 몫이다. 작게는 청소에서부터 시작해 밭일, 짐 옮기기, 행사준비에 이르기까지 노동에 참여한다. 신학생들은 체력단련과 노동을 통해 하느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체력을 기르고 협동정신과 노동의 가치를 익힌다. 또 수고로움을 주님께 봉헌함을 배운다.
19:00
저녁기도를 바치고 저녁식사를 마치자 신학교 뒤쪽 산으로 해가 넘어갔다. 어스름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신학생들이 하나, 둘 문을 나선다. 한 손에는 묵주가 쥐어져 있다. 적게는 두세 사람, 많게는 수십 명이 모여 교정을 산책하며 묵주기도를 바친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끝기도에 들어갈 즈음엔 이미 신학교에 어둠이 깔렸다. 그리고 어둠보다 무거운 침묵이 깔린다.
끝기도 시간 이후는 대침묵 시간이다. 침묵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하느님에게서 자신을 온전히 차지하실 수 있도록 내어놓는 영적 행위임과 동시에 이웃을 배려하고 상대방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덕이다. 신학생들은 침묵을 통해 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닫는다.
기도와 묵상이 끝난 오후 8시부터는 하루의 마지막 일과인 연학(硏學) 시간이다. ‘학문에 힘쓴다’는 ‘면학(勉學)’이 아니라 ‘학문을 연구한다’는 ‘연학’이란 말을 썼다.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는 신학생들은 그저 알기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생각하고 진리를 따져야 하기에 ‘연학’이란 말이 어울렸다. 연학 중에도 대침묵은 이어진다. 오후 11시. 불이 꺼지면 신학교의 하루가 마무리된다. 다시 종이 울려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기까지 고요함이 신학교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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