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따뜻한 햇살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외출하기 좋은 날씨다. 오전 10시 이용훈 주교는 나갈 채비를 했다. 복장이 낯설다. 긴 수단과 띠가 아니라 간편한 복장에 배낭을 메고 운동화 끈을 조였다. 머리엔 주케토 대신 챙 달린 모자를 쓰고 손에는 목장이 아닌 등산용 지팡이가 들렸다. 바로 이 주교가 수원교구 성지순례길인 디딤길을 직접 걷기로 한 날이다.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기도를 바치고 사무실을 찾아가 직접 디딤길 확인증에 도장을 받는다. 동네가 낯설다. 정자동에서 10년을 살았지만 두 발로 걸으며 보는 마을의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교구를 책임지는 교구장으로서 매일 아침에 일어나 저녁까지 해야 할 일이 가득했기에 개인적으로 외출하거나 산책할 시간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등산해본 것도 7~8개월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손골성지까지. 거리는 불과 10여km 정도에 불과했지만, 광교산 시루봉(582m)을 넘어가는 여정이다. 도보성지순례연구팀 ‘디딤길’ 팀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이 순례길을 걷는다.
“저는 마리안나고 여기는 실비아예요. 이런 데서 주교님을 뵈니 정말 반갑네요.”
순례길에서 이 주교에게 인사하는 교구민들을 만났다. 사복을 입고 모자를 써 못 알아볼 법도 한데 교구민들은 마치 양 떼가 목자를 알아보듯 이 주교를 알아보고 인사한다. 그때마다 이 주교는 자리에 멈춰 서서 마치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족이고 친구인 양, 그들의 손을 꼭 쥐며 미소 지어 인사한다.
점점 경사가 가팔라진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지만, 걸음걸이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묵묵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3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시루봉에 올랐다. 용인과 수원이 한눈에 보인다. 여기서 보이는 모든 곳이 다 수원교구지만 사실은 수원교구의 절반도 채 보이지 않는다. 이 넓은 교구에 성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고 그 숨결을 따라 길을 이었다. 이 주교는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봉우리에서 내려오니 어느덧 손골성지가 나타났다. 성 도리베드로헨리코 신부가 선교하다 체포된 곳이다. 이 길을 기도로 시작한 이 주교는 순례의 끝을 기도로 마친다. 순례를 마친 이 주교는 ‘디딤길’ 팀원들에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여러분이 심어놓은 조그만 밀알들이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앞으로도 이 디딤길을 만들고 걸어가는 일을 잘 해내시길 바랍니다. 이런 우리들의 순례가 더 많은 이들의 순례로 이어져 자신의 성화와 개인의 일들, 그리고 교구발전에 도움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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