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시아의 여러 지역 교회들에서는 젊은 층의 신자 수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는 통계 보고가 이어진다. 이러한 종교-사회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서 상대주의의 만연을 지적할 수 있다.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바탕 위에서 세속주의, 물질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그리고 황금만능주의 등 반복음적인 풍조들이 널리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절대적인 신앙적·윤리적 가치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교황으로 선출되기 이전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부터 현대의 사회 환경 속에 만연해 있는 ‘상대주의의 독재’에 관해 이미 자주 언급해왔으며, 특히 세계청년대회(WYD) 등 젊은이들과 관련된 행사를 통해 이러한 언명이 많이 이루어졌다. 지역교회의 주교들과 사목자들 역시 상대주의에 물든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스마트폰 같은 최첨단 전자기기들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홍수에 마비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하고 성찰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모두 상실해버린 것 같다.
상대주의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
상대주의를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 고찰해볼 수 있겠다.
첫째, 철학적·윤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상대주의는 더 이상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은 사실상 사회적·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지식에 불과하기에 상대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광범위한 사회 현상을 포괄하는 사회-문화적 에토스(ethos)로서의 상대주의를 말할 수 있다. 도덕적 상대주의, 자기만족 추구의 문화(culture of complacence), 그리고 정의에 관한 상대적 이해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기분과 느낌에 좋은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의 상대주의에 해당한다.
첫 번째 관점에서 아시아 청소년들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참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아시아의 다른 종교들로 떠나가는 일부 젊은이들의 현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세계적인 종교전통들의 탄생지로서의 아시아에는 고유한 종교-문화적 풍부함이 있다. 이는 아시아교회가 갖는 고유한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정신문화적 풍부함 뒤에는 종교 다원주의의 도전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용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를 떠나 다른 아시아 종교에 대한 신봉자로 변화되는 경우들이 여러 지역교회에서 속출하고 있다. 왜 그들은 자신이 세례성사를 통해 태어나고 받아들여진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나가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아시아교회의 특수성을 이해하여 타 종교들을 이해하며 그들과 대화하고 협력하여 사회적 평화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관용의 정신이 필요하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공존 속에서도 고유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합하는 조화로운 균형 감각과 통찰력이 아시아교회의 모든 구성원들, 특히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지도자와 사목자, 신학자들에게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관점, 즉 사회-문화적 풍조로서 아시아 청소년들에게 파고들고 있는 상대주의의 문제점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오늘날 젊은이들의 관심사가 그들 부모 세대에 비하여 확연히 달라진 것을 볼 수가 있다. 1970~80년대 젊은이들의 주된 관심사가 정의와 평화, 인간 존엄성과 권리에 관한 사회적 이슈였다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진부한 삶의 양식 안에서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그리고 정의와 행복에 관한 매우 모호한 의식 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경제적 위기와 낮은 취업률이 그들을 점점 더 제한되고 편협한 상대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에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순간적인 재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생명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경외심도 하락해가고 있다. 이는 최근의 높은 자살률과 낙태 현상, 무분별한 생명공학적 연구 등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생명을 중시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등의 수백 년 간 지속된 아시아의 전통 문화적 가치들은 이제 젊은이들에 의해 배격되고 있으며, 어른들은 이 성난 젊은 세대와 어찌 소통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도덕적 가치와 정의의 개념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에 종속되는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무엇이 옳은가?’는 이제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있어 방향 잃은 외침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들이 좋고 만족스러우며 안전하게 느끼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가치관에서 파생되는 그릇된 사회 풍조로서 우리는 물질만능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그리고 학교 폭력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 있겠다.
한 가지 구체적 예를 들어본다면, 이제 서구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가며 급속도로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을 겪고 있는 아시아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돈이 전부라는 암묵적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음이 여러 통계조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외모에 너무 집착하여 성형수술, 명품 가방, 보석과 패션 의류 등에 지나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표피적인 외적 아름다움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부와 힘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한 가정에서 하나의 아이만을 낳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과 중국 등 동북아시아에서 이렇듯 개인의 아름다움과 부를 추구하는 극단적 개인주의는 더욱 드세어지고 물질만능주의의 형태로 왜곡되어 나타난다. 반면에 사회적 공존과 공동선에 대한 관심과 추구는 더욱 약화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들은 힘들 때 기대거나 의지할 만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상대주의적·물질주의적·개인주의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이 느끼고 있는 정신적 황폐함과 내적인 좌절, 그리고 절망과 고통을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방황하는 젊은이 절망 읽어야
교회 안의 젊은이들 역시 이러한 상대주의적 에토스에 감염되어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의 젊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른바 ‘쿨’(cool)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정의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도 한 분이시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할 것이다. 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믿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신앙은 특별히 인격적인 차원에서 통합되고 내면화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이 모든 교회 내 활동이 과연 얼마나 자신에게 좋고 만족스럽게 느껴지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친교에는 분명 긍정적 측면이 있고, 그것이 청소년사목의 일부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교회 내 젊은이들의 친교에는 뭔가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사회-문화적 풍조로서의 상대주의는 지금 당장 그들로 하여금 가톨릭교회를 떠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거기에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그들의 신앙적 정체성에 뭔가 분열을 일으키고 그들의 마음 안에서 종국적으로 교회와 신앙을 등지게끔 하는 잠재적 씨앗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도전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아시아교회를 탄생시킨 신앙의 선조들이 남긴 모범 안에서 근원적인 반성을 해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선택은 그 시대의 모든 박해와 탄압을 거슬러 내린 용감한 결단이었으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 특히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몰이해와 버림을 받음에도 굴하지 않은 결과였다.
한국의 경우, 당대의 지배적인 유교 질서 안에 태어나 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여 목숨을 바쳐서까지 이를 고백하였던 순교자들의 정신 안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종교적·윤리적·문화적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모범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교회의 번영은 순교자들이 피로써 뿌렸던 씨앗이 자라나 지금 수확을 거두고 있는 결과이다. 오늘날 과거와 같은 물리적 박해와 탄압은 없지만, 오히려 더 무서운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만연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어떻게 우리 신앙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재발견하여 오늘의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도전과 위협에 대응할 것인가는 아시아교회 구성원 모두의 과제라 할 수 있겠다.
보다 구체적으로, 특히 사회-문화적 풍조로서의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청소년사목과 종교교육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젊은이들이 삶과 신앙의 통합적 차원에서, 즉 ‘삶을 신앙의 차원에서 그리고 신앙을 삶의 차원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청소년사목과 교리교육에는 신앙과 삶의 역동성을 체험케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
만남 통해 감명 받고 변화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만남일 것이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구체적 삶 안에서 진정성 있게 신앙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헌신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감명 받고 변화될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우리 어른들이야말로 상대주의적 가치관에 오염되어 세속적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부정적 본보기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이제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아시아 젊은이들의 진정한 스승과 부모로서,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로서 함께 기도하며 깨어나야 할 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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