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수도원에 입회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방학 때인가 싶은데, 사촌 누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신심이 깊은 누나는 수도생활을 선택한 제가 기특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때 사촌 누나랑 그리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눴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나는 저를 대견하게 보면서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석진아, 우리 동네에는 수사님들이 운영하는 피정의 집이 있는데, 거기에는 연세 드신 수사님 한 분이 계셔. 그런데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분을 정말 존경해. 왜냐하면 겸손하고 항상 웃으시고 걸음걸이도 품위있게 걷고 그래.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분의 모습을 보면 왠지 성자(聖者)를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드나봐! 나 역시도 여러 번 동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 사람들이 모이면 그 수사님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그 사람들은 천주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거든.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그런 사람인 듯한데, 그분들이 할아버지 수사님을 볼 때마다 자기네들끼리 예수가 누구인지 몰라도 저 할아버지 수사님을 보면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말을 해. 나도 할아버지 수사님을 뵌 적이 있는데, 그냥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모습이 예사 분이 아닌 것 같기는 하더라. 너도 열심히 살아서 나이 들어 그런 분이 되렴.”
저는 사촌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그 피정의 집이 우리 수도회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바보 같이! 당시 저는 서울에 있는 지원소에 있었고, 피정의 집은 제주도에 있었던 것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간지 얼마 안 돼 뭘 잘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그 후 할아버지 수사님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사님께 좀 잘 보이려고, 사촌 누나가 해준 말을 그대로 전해 주면서 수사님이 무척 자랑스러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수사님은 방그레 웃으시며 “에이, 그거 사람들이 그냥 해주는 말이야. 수도 생활, 도중에 포기 안 하고 예수님만 생각하면서 이 늙은이처럼 수도원에 버티고만 있으면 돼. 그러면 누구라도 그런 말을 해줄 거야. 우리 함께, 이 생활 별로 특별한 것 없어도 예수님 때문에 천천히, 그렇게 천천히 살아가자. 그러면 먼 훗날 많은 사람들이 형제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누군지는 몰라도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거라 말해줄 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십년, 아니 또 십년이 훨씬 넘게 흘렀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수도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수도생활 그다지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솔직히 갓 입회했을 때 열정마저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이 생활한다고 잘난 척도 했고, 이 삶을 꽤 멋있게 포장해서 자랑도 했는데, 요즘은 그것마저 없이 하루를 조용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별로 특별한 것이 없을수록 삶 자체가 주는 평온함과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모르겠습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우직하게 사는 것, 그것이 삶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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