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산하 우리집공동체(시설장 하태욱)가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첫 입소인원 40여 명, 90년대말 IMF사태 당시 60여 명, 현재 인원 17명이 되기까지 우리집공동체는 역사의 순간마다 노숙인들과 함께해오며 진정한 노숙인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 우리집 이야기
1992년 1월 12일 문을 연 우리집공동체는 처음 몇몇 평신도들의 손에 의해 장소가 마련됐고, 무료진료소 요셉의원의 전임 의무원장 고(故) 선우경식 선생의 제안으로 쉼터와 같은 노숙인시설로 방향을 잡았다.
90년대 초반 당시 노숙인들은 매혈과 앵벌이 등으로 서울역 인근에서 연명하던 이가 대부분이었으며, 우리집공동체가 문을 열자 40여 명의 노숙인들이 이곳을 찾았다. 고인수 신부(예수의 작은형제회)의 주례로 개원미사를 봉헌한 우리집공동체는 90년대 말 IMF사태가 일어나자 갑작스럽게 늘어난 노숙인들로 인해 60여 명의 입소인원을 이뤘다.
하태욱 시설장은 “처음에는 지역주민과의 마찰도 종종 있었지만 2005년 이후 밑반찬 봉사 등 우리집공동체와 지역사회가 함께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인근 정릉본당 몇몇 신자들이 주축이 돼 가정에서 밑반찬을 지원했던 봉사는 우리집공동체가 지역사회와 활발히 소통하면서부터 본당 레지오와 연결, 정기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현재 각 쁘레시디움별로 우리집공동체를 직접 찾아 밑반찬 등의 봉사를 하며, 한 달에 한 번 미사를 봉헌하기도 한다.
우리집공동체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로 시설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많고, 새벽에 전화만 오면 사망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술로 인해 질병을 떠안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이들에게 희망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위로를 받았던 것은 ‘우리집공동체’라는 이름이다. 노숙인들의 주머니에 우리집공동체 연락처를 넣어놓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신원조차 알 수 없는 이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우리집공동체 쪽지는 ‘우리집’이라는 말 때문에 진짜 노숙인의 집으로 인식됐고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왔다. 많이 안정된 지금, 이 이야기는 작은 에피소드로 남았지만 하 시설장은 노숙인들을 찾을 때마다 당시 우리집공동체라는 이름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회고한다.
현재 우리집공동체는 전남 해남에 작은 땅을 빌려 간단한 농사를 짓기도 하고, 생일을 맞은 이에게 미역국 등을 대접하며 소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우리집공동체는 설립 20주년을 맞아 12일 서울 정릉3동 현지에서 기념미사와 조촐한 기념식을 열었다.
카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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