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의 발전과 성당 건립
“수원교구는 아직 발전도상에 있으니 주교님도 그렇고 신부님들도 그렇고 할 일이 많다. 하느님 안배에 맡기고 신부님들이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새 주교님을 도와 수원교구를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남수 주교는 회고록에서 수원교구가 가장 빛나는 발전과정에서 주교직을 수행했으므로 ‘행복하기 짝이 없는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주교의 재임 당시는 새 신자들을 맞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절이었다. 수원의 발달로 서울 사람들이 수원으로 이주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김 주교의 부임 당시 수원교구는 31개 본당, 신자 수는 6만7000명이었다. 김 주교는 임기 중에 최덕기 주교가 설립한 성당까지 모두 100개를 채울 정도로 새 신자들에게 넉넉한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성당 건립에 힘을 모았다.
▲ 1994년 새 교구청사 기공식 장면.
▲ 1988년 교구 설정 25주년 행사에서 장애인 달리기에 함께하고 있는 김남수 주교.
해외선교
“내가 지금까지는 구걸해 성당 짓고 신학교도 짓고 했지만 이제부터 구걸 행각은 안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외국으로 간다하면 신부님들과 교우분들이 오히려 나한테 돈을 갖다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의 주교들을 만나서 주겠습니다. 지금까지 도움을 받고 살았지만 이제는 갚아야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거듭나던 전환의 흐름에는 김남수 주교가 있었다. 김 주교는 재임 시절, 교구의 경제적 자립뿐 아니라 한국외방선교회를 육성할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제3대 총재직을 맡기도 했으며, 중국교회와 결연을 맺기도 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에 ‘우리가 로마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이젠 남을 도와줄 형편이 됐으니 아프리카나 가난한 다른 나라로 원조를 돌려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으며, 아시아 지역 선교에 좀 더 힘을 쏟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사회복지
“한 본당에서 양로원이든, 고아원이든, 장애인 시설이든 하나 정도씩 운영해주었으면 했다. 그렇게 하면 그 본당 전 신자가 돌보게 되니까 서로 사랑을 키우게 되고, 수원교구 전체가 ‘사랑의 복지 교구’가 되는 것이다.”
교구가 사회복지에 대해 생각할 여유 없이 교구 발전에만 몰두하던 당시 김남수 주교는 사회복지국을 통해 교구 예산의 10%를 사회복지국에서 쓰도록 배려하고, 본당 예산의 10%를 복지사업에 쓰도록 했다. 서울의 땅값이 비싸지면서 인접한 수원교구에 서울 복지기관들이 몰려왔는데, 김 주교는 이들을 모두 우리 사회복지국에 영입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할 정도로 교구의 책임 아래에서 작은 복지단체들이 좋은 몫을 해내길 바랐다.
수도회와 성지 발전
“나는 주교라도 내 맘대로 할 수 없었고 본당에서 투자한 땅이니 그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나라에 가신 수녀님께서 아마 이제는 나를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싶다.”
마더 데레사가 창설한 사랑의 선교수녀회가 수원으로 이전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다. 당시 수녀회가 쓰겠다고 한 땅이 석수동본당이 사놓은 땅과 겹쳐 김남수 주교가 본당과 이야기하라고 하자, 마더 데레사가 직접 찾아와 따졌다는 이야기다. 김 주교는 이후 도시개발계획으로 지었던 수녀원이 헐리게 되자 교구의 땅 가운데 안산시의 터를 주고 경제적 부담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수도회와 성지 발전에 뜻을 품었던 김 주교는 미리내수도회 설립과 한국외방선교회 발전에 핵심적 도움을 주었으며, 성모순례지인 남양성모성지, 교구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가 살아있는 천진암 성지 설립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수원신학교 전경.
생명수호와 가정성화
“나는 견진 강론 때마다 아기 낳기에 대해서 강조하기를 빠트리지 않는다. 자유 좋아하는 요즘 젊은 부부들이 자기 자녀의 세례는 그들이 커서 스스로 결정하게 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이런 인본주의 세상에 유아 세례가 얼마나 귀한 전교이겠는가?”
김남수 주교는 교회의 미래가 산아 장려에 달려있고 성소계발이 곧 교회의 발전이라고 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라는 성경구절을 자주 인용할 만큼 그는 생명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따라서 그는 사형제도 폐지와 낙태, 저출산문제 등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러 차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우리 민족성과도 연결되며, 윤리가치를 회복하고 이 시대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제 양성
“대구관구와 광주관구의 신자 수를 합친 것과 서울관구 신자 수를 견주어 보면 서울 쪽이 더 많다. 그런데 신학교는 대구, 광주 쪽에 두 개가 될 때 서울 쪽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대구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 때, 벌써 불균형이 생긴 것이다. 그 불균형을 바꿔 놓은 것이 수원신학교다.”
1980년 추계 주교회의에서 수원에 신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제의를 한 것이 김남수 주교다. 김 주교의 이러한 노력으로 수원가대는 1984년 3월 첫 신입생 48명이 입학, 1988년 준공미사를 봉헌하며 힘차게 출발했다. 교구의 사제가 이만큼 많아진데도 김 주교의 사제 양성 노력이 바탕이 된 것이다. 김 주교는 회고록에서 수원가대 설립에 대해 재미있으면서도 자부심이 담긴 말로 설명한다.
“그때 수원교구에서 신학교를 안 세웠더라면 우리나라 전교는 정말 지지부진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수원신학교의 설립은 내 주교 수행과정에서 가장 빛나는 일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1993년 사랑의 선교수녀회 ‘평화의 집’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김남수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