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치르신 죽음을 대가로 아름답고 귀한 미사를 선물 받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세상 곳곳에서는 미사를 통한 예수님의 희생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희생은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니,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1독서 말씀이 아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날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충실히 지켜냈더라면 ‘어쩌면’ 우리에게는 미사의 은총이 선물되지 않았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음을 밝히고 있기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믿음을 살아내지 못할 때에는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은총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으니까요(로마 11장 참조).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 과연 믿음은 무엇인지, 믿음을 살아내는 모습은 어떤 것일지 쫀쫀히 살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읽은 복음말씀이 여엉 시원치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들의 모습이 데데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무교절 첫날, 파스카 음식을 먹을 자리를 어디에 마련할 지 여쭙는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대답도 시원찮고 이 황당한 말씀에 두말없이 나선 제자도 한심해 보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 가거라”고 하셨는데요. 솔직히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낯선 이에게 대뜸 “내 방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라 하시니 난감한 일이 아닌가요? 그럼에도 한마디 이의를 달지 않고 벌떡 나섰다니, 정말 모자란 듯 보입니다. 심부름을 시키려면 어느 길로 가서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라든지 아니면 대문이나 지붕색깔이라도 알려 주는 게 옳지 않나요? 또는 번지수를 알려주거나 그들의 차림새나 얼굴의 특색이라도 일러주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저 “도성 안에 물동이를 지고 가는 남자”라고만 하십니다. 갑갑합니다. 저 같으면 그날 세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상세한 자료를 청하며 날밤을 샜을 것만 같습니다.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예,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라고 상큼하게 약속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꼭, 꼭, 꼭, 하느님께 의탁하여 믿음으로 살아가리라 마음먹고 작정하는 순간만은 정말이고 참이고 진심이니까요. 이때문에 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약속을 그르치며 어깃장을 놓는 그들의 형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말’과 ‘마음’이 따로 놀아본 체험자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되었음을 믿습니다. 한 조각의 밀떡과 한 잔의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임을 믿습니다. 미사 때마다 그분을 향한 경배와 흠숭과 감사를 바칩니다. 그런데 그 뿐입니다. 입으로만 말로만 되뇌입니다.
한마디로 단정한다면 그분을 모신 거룩한 모습은 ‘교회용’으로 간수되고 ‘예배용’으로 사용합니다. 이때문에 세상일에서는 비신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처럼 말하고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재물과 명성과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하고 최고가 되지 못해서 안달하며 불만을 쌓고 골머리를 썩입니다. 성체를 모신 우리가 곧 예수님임을 알면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밑지는 쪽을 선택할 것을 약속했음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갈 바는 그분의 길이고 우리의 할 바는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이라 말하면서도 그렇습니다.
이야말로 ‘교회용’ 전례에서 ‘예배용’ 성체만 모시는 오만함입니다. 결국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다”(오바 1,3)는 판결을 듣게 될지 모릅니다.
미사는 하느님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삼위 하느님께서 온 것을 바쳐 지으신 최대의 걸작입니다. 믿음은 그 미사의 은총을 담는 영혼의 그릇입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무조건 살아갈 힘을 얻는 원천입니다. 그날 제자들처럼 ‘터무니없고 갑갑한’ 그분의 이르심에도 아무 이의 없이 순명하여 세상을 헤쳐 나가는 용기를 선물합니다. 마침내 그분과 하나가 되도록 하는 탄탄한 축복의 줄입니다. 아멘.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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