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30대 초반의 직장인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사는 이야기 나누며 수다도 떨고, 직장상사 험담도 하고, 결혼한 사람은 결혼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하라는 성화에 힘들다는 말과 함께 속상했던 일을 털어 놓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동화되기보다 가끔 ‘어느 부분에서 멋있고 좋은 말들을 해줄까’하는 유혹이 생기곤 합니다. 다행히 그날은 그런 마음을 꾹 잘 눌렀습니다. 사실 사제로 살면서 대화 중에 은근히 잘난 척 하고 싶은 마음, 즉 ‘나는 모든 문제를 잘 알고 있고 해결 방법도 나름 알고 있는 신부’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잘 듣기만 했는데, 신기하게도 어떤 자매님이 하고 싶은 속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사실, 신부님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월급 때가 되면, 이것저것 뗄 것 다 떼인 후 월급통장을 확인할 때. 휴, 남는 것 없는 빈털터리 통장을 볼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심정 아시겠어요? 가족들과 내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말 안하지만, 정말 사는 거 힘들어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잖아요.”
‘신부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지금도 그 말이 마음속에 애잔하게 들려옵니다. 평소 모임에서 주변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분들의 힘든 일이나 상황을 듣게 되면, 사제인 저는 그들의 이야기에 뭔가 주석을 달려고 하고 해석을 해주려하고 그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이유로 뭔가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그들은 제 이야기를 듣기는 하지만 더 깊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어주기만 했을 때는 자신들의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이기에, 속의 말을 털어 놓으면서 스스로 해결책도 찾고 자존심 때문에 감춘 이야기도 좀 더 깊게 들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냥 함께 있어주기만 했는데도, 사람들은 평소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한 감정, 느낌들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살면서 아파도 어디 가서 속 시원히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힘들어도 정말 힘들다고 말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많은 것을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제 자신 스스로도 같은 세상을 살면서 겉으로는 일상의 하루를 성실하게 살고 별 문제없이 살아가는 그들이, 속으로는 힘들고 지치고 아프지만 자신의 상태를 속 시원히 말하면 가족과 주변사람들이 더 괴로워할까봐 차마 말하지 못하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보았습니다. 제 마음도 더 아팠고, 차마 그 어떤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삶, 정말 모르는 것이 많았습니다. 사제로 수도자로 살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쉽게 아프다 말하고, 가볍게 힘들다 이야기하고, 늘 위로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우짖는 제 삶도 보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말과 함께 정말 힘든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우리 신자들, 그냥 ‘힘내시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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