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29일 제13대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한 이래 교구 수장(首長)으로서 14개 성상(星霜) 동안 서울대교구의 성장과 발전을 지켜보았던 정진석 추기경. 6월15일 이임미사를 앞두고 있는 정 추기경을 만나 교구장직을 떠나는 소회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교회 최고 어른으로서 세상과 신앙에 대해 느끼는 이야기도 함께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다.
예의 그 환한 미소 속에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 소박하고 간단한 퇴임 소감을 밝힌 정 추기경은 “시원섭섭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런 것보다는 그저 직책 하나 바뀌어 자리를 바꾸어 가는 정도의 느낌으로 담담하다”고 덧붙였다.
“교구장 직분은 교황님이 주신 임시 직분이지만 주교직 사제직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까 계속 간직하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14년전 청주교구장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직책이 바뀌었던 것처럼 교구장 자리를 떠난다 해도 그저 직책이 하나 바뀌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6월 15일 이임 미사 후 6월 20일 혜화동 신학교 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인 정 추기경은 “익숙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상황이다 보니 궁금증 호기심도 적고 그래서 크게 마음에 동요되는 것이 없는 듯하다”고 감정의 무덤덤함을 설명했다.
“내 삶은 명동성당과 혜화동 신학교를 왔다갔다 하면서 마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명동성당의 어린시절, 혜화동 대신학교에서의 신학생시절, 이후 서품을 받았고 서품 받고 난 뒤에도 교구장 비서 발령을 받아 명동에 오게 됐습니다. 그 다음에는 소신학교 부교장을 맡게 돼 다시 혜화동에 가게 됐어요. 혜화동 신학교 생활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14년이라는 서울대교구장으로서의 시간. 짧다고는 할 수 없는 10여 년의 세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을 법한데, 정 추기경은 “특별한 기억보다는 매일을 ‘이날이 마지막 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성실히 살려고 전심전력을 다해 노력했다는 심정이 크다”고 했다.
“6·25 전쟁을 겪으며 생사기로에서 몇 번이나 헤맸던 경험은 그 후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고 봐요. 내 생명이 살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이죠. 오늘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보람 있게 쓸 것인가에 관심이 큽니다. 교구장 재임 기간 중 각별한 인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그렇게 매순간이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임했기 때문일 듯 싶습니다.”
착좌 때부터 가정 생명 부문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던 정 추기경은 14년의 교구장 재임 활동 중에서 ‘생명’ 수호에 대한 부문에서는 세상 흐름과 타협하지 않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던 것으로 꼽힌다.
그러한 평소의 모습처럼, 앞으로 교회가 생명문제와 관련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서는 다소 목소리가 커졌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신비로운 은혜인데 경외심이 너무 부족합니다. 인식도 부족하고요. ‘생명’은 신비란 말을 계속해도 모자랍니다. 그런 고귀한 일을 미소한 인간이 조작하려 드는 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정 추기경은 “자연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 해도 인간이 밝힌 생명의 신비 부분은 아주 미약하다”면서 “그런데 교만한 자세로 생명의 신비와 기원들을 모두 아는 듯한 자세는 심히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생명의 영역은 하느님 고유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교회의 생명운동이라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만해서 생명을 물질처럼 함부로 다루고 있는 현실, 또 그러한 상황을 너무 경시하는 경향도 큰 문제”라고 밝혔다.
“정신력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보통 이상의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는 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신비인데, 이런 것에 대해 너무 경시하니까 조작할 수 있다는 착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 추기경은 “하느님 영역을 넘어서고 질서를 위반하는 행동은 결국 인간에게 파멸을 가져올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얘기해야 할 부분”임을 역설했다.
(사진 조대형 기자 (michael@catimes.kr))
“한국이라는 여건 아래서 서울대교구가 지니고 있는 위치는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고 서두를 꺼낸 정 추기경은 “‘새로운 복음화’에 대한 기조 속에 ‘신앙생활의 성숙’에 대해 많은 이들이 걱정과 우려를 내비치고 있는 현실인데, 그에 대한 공감이 많아졌으면 하는 희망”이라고 했다. “내적으로 질적으로 신앙적 깊이가 쌓이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 안에서 교회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부분이 더 커져서 상당히 밝은 빛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를 신자들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자기 혼자 생겨난 것처럼 생각하고 그래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인터뷰는 ‘사회정의’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다변화된 세상 안에서 신자들이 지녀야 할 신앙의 핵심과 본질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정 추기경은 “사회정의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로 자주 떠오르고 있는데, 사회정의가 근본적으로 무엇인지 뚜렷이 알고 있어야 신자로서 중심을 잡는 행동이 나올 것”이라면서 “사회정의는 바로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지목했다. 또 “자원의 낭비도 사회정의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정 추기경은 일갈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온 구원 역사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다면 사회정의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 될 것입니다. 내 삶의 출발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사회정의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구장직을 물러난 이후에는 어떤 계획으로 일과를 보낼 예정인지 물었다. “매순간 가장 가치있게 시간을 써야한다는 생각이 크다”는 정 추기경은 “책 저술도 그 일환”이라고 소개하면서 “아직 특별한 계획을 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살아있는 만큼 왜 나에게 오늘 하루를 주셨나 생각하면서 그 뜻에 부응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