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평양교구 신우회’(회장 고원익) 총무 김만복(로사·80)씨를 15일 오후 서울 후암동 자택에서 만났다.
집안에 들어서자 김만복씨가 방금 전까지 정성스레 바느질하던 전례복과 복사복, 제대포가 거실에 가득했다. 평생 업으로 했던 바느질을 이제는 본당을 위한 봉사로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김씨가 미혼으로 18세이던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해 12월 7일 목숨을 걸고 얼음이 둥둥 떠다니던 대동강 철교를 건너 부모님, 형제들과 월남했다. 열흘을 걸어 영등포에 도착해 다시 공주, 수원, 김포와 오산을 거쳐 평택에서 결혼한 후 서울 후암동에 정착, 50여 년째 살고 있다. 누구나 어렵던 시절 생계를 위해 남대문시장에서 미싱일을 시작했고 점퍼 사업으로 성공했다. 지금도 후암동 주민들은 김씨를 ‘잠바집 아줌마’라고들 부른다.
김씨는 분단과 북한의 공산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 한순간도 신앙의 끈을 놓은 적이 없다. “걸어서 피란 다니면서도 산 속에 숨어 있는 날이 아니면 지나가다 보이는 성당에서 가족들과 미사를 드렸어요.”
김씨의 고향은 평안남도 서포로 평양과는 기차 한 정거장 거리 지척이다. 서포는 1931년 설립된 서포본당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현 서울 정릉동 소재)가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평양교구(1927년 설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던 지역 중 하나였다.
김씨 집안은 조부모 대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김씨도 서포본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릴 적 본당 앞을 지날 때는 꼭 허리를 숙여 경배하곤 했어요. 서포본당과 수녀회 건물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남북분단 이후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돼 서포본당은 몰수되고 북한군의 병원이 됐다. 김씨의 가족들은 천주교신자라는 이유로 심한 탄압을 받았다. 1948년 당시 열여섯이던 김씨도 북한 당국자 앞에 끌려가 천주교를 믿지 말 것을 강요당했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김씨는 매월 넷째 주 수요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봉헌되는 평양교구 신우회 미사에 빠지지 않는다. 30명 정도가 참례하고 있고 모두 80대 이상 고령이다. 김씨가 그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해 신우회원들에게 ‘색시’라고 불리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지만 우리는 60년 넘게 고향에 못 가고 있습니다. 매일 통일을 기원하며 기도합니다.”
김씨는 “신우회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있어 안타깝다”며 “자녀들이 신우회 미사에 많이 참석해 신우회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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