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외국에서 오랫동안 현지 본당사목을 하시는 신부님을 다른 동료 신부님들과 함께 뵌 적이 있습니다. 아주 가끔, 그 신부님을 뵐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분은 온화한 성품에 따스한 마음으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맞이해 주시고는 했습니다. 그 신부님은 그 나라 언어를 무척 잘 하시지만, 그런 것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면서 겸손을 품고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무튼 그날 함께 찾아간 한국 신부님들과 저녁을 먹고 이러저러한 수다를 떨었습니다. 식사 후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그 신부님이 방에 들어가셔서 통기타와 70~80년대 유행하는 노래들을 모아놓은 두꺼운 기타책을 갖고 나오셨습니다. 그런 다음,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순간 ‘나이든 남자 다섯 명이 저녁에 기타 치고 노래를 부른다? 이 밀려오는 쑥스러움과 이상야릇한 마음이라니!’
하지만 신부님은 정말 그 노래책 첫 장부터 천천히 넘기시더니 조금이라도 아는 노래가 있다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타 실력도 그다지…. 하지만 신부님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으신 채 기타를 치시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긴 머리 소녀’ ‘길가에 앉아서’ ‘등불’ ‘모닥불’ ‘웨딩케익’ ‘아침이슬’.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함께 있던 저와 다른 신부님들도 노래를 따라 불렀던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은 천장을 보며, 어떤 신부님은 창밖을 보면서, 또 어떤 신부님은 눈을 감고, 저는 신부님 곁에서 악보책을 잡아 드리면서 각자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느덧 그 두꺼운 책에 실린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노래에는 박수를 치며 불렀고, 어떤 노래는 다함께 화음까지 넣어 불렀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신부님들은 노래가사에 어떤 소중한 사연이 있으면 그 사연이 있는 대로, 혹은 자신만의 70~80년대를 거슬러 올라가듯 그렇게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모두가 노래라는 것에 몰두한 채 자신들의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습니다.
누가 더 잘 부른다고 말하는 사람, 노래 못 부른다고 탓할 사람도, 가사 틀렸다고 지적할 사람도 없고, 노래 한 곡 끝났다고 그 점수를 기다릴 것도 없이, 노래를 알면 따라 불렀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듣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노래를 부르신 후 그 신부님은 함께 있던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나도 여기 살면서 힘들 때가 있지요. 암, 타향살이 힘들지 않을 수 있나요? 그런데 가슴까지 힘든 것이 슬픔으로 차오르면 이렇게 노래를 목청껏 불렀어요. 그런데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나면 다시금 평온을 찾게 되더라고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 신부님과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한편의 움직이는 그림 같았습니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아름답게 뿜어내는 그림 말입니다. 그날 밤 잠들기 전, 그 그림의 한 장면 속에 저도 함께 있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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