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수원교구는 ‘너무 가난해서 어떻게 살까?’하고 서로 걱정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 교구보다 1년 전 1962년 인천교구와 춘천교구가 살림이 날 때는 부자 나라 소속인 주교님이 계셔서 적어도 이렇게 저렇게 도움을 받곤 했는데 우리에겐 방인 주교님이 오시니 어디 가서 도움을 청할 길이 없어 말은 안 했지만, 은근히 섭섭했던 얘기를 선배 신부님들한테서 심심치 않게 들어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을 일이지만, 그전엔 초근목피로 연명한다거나 춘궁기를 어떻게 넘기나 하고 걱정을 하던 때였음을 아프게 기억합니다.
어느 교구에선 외국 선교사가 본당을 떠나고 한국 신부가 부임한다고 하니까 신자들이 들고일어나서 “우리 본당엔 아직 한국 신부가 오면 안 된다”고 했을 정도였답니다. 외국 선교사들은 사제관 살림은 물론 본당의 운영도 대부분 당신 나라에서 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수원교구는 더구나 방인 주교님이 부임하시니 재정적으로 더 어려워서 서울교구청에 가서 주교댁(지금의 교구청) 생활비라도 좀 도와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을 때의 심정을 당시 주교댁에서 근무하던 신부님으로부터 얘기를 들었을 때 몹시 섭섭하다 못해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신학생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서울에 가서 모금(우르술라 회)이라도 할라치면 서울교구로부터 거절을 당하기도 해서 우리 교구장이셨던 고 김남수 주교님이 직접 가시면 설마 그런 얘기는 하지 않겠지 했는데 서울의 어떤 주교님이 노골적으로 “서울에 오지 마세요”라고 해 수모를 당했던 말을 듣고 정말 분통이 터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정부에선 서울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해서 청계천 판자 동네를 남한산성 남쪽 산기슭에 집단 이주시키는 어마어마한 대역사를 1969년에 단행합니다. 후에 이곳을 산성 남쪽이라 해서 성남(城南)이라 불리게 됩니다.
우리 수원교구가 이래저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참에 또 이런 참담한 일을 교구가 고스란히 껴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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