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한국의 산업화에 따른 인구증가가 도시에 집중되다 보니 1969년 당시 서울 인구 380만 명 중에 약 3분의 1인 128만 명이 무허가 건물에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국가적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국가발전에 큰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궁여지책으로 계획을 세운 것이 황량한 남한산성 남쪽 산등성이에 광주공업단지입니다. 그런데 이 광주공업단지는 선입주 후건설이란 어처구니없는 시책으로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던 무려 약 30만 명을 3년 안에 이주시키는 무리를 단행해 세워지게 됩니다. 성남시는 1973년 시로 승격이 되지만 우리 교회는 이곳에 본당을 신설해야 하는데 오히려 신자들의 삶에 보태주어야 할 형편이다 보니 재정적 뒷받침이 되지 않아 1993년까지 5개 성당밖에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열악했으면 서울 노량진수산물시장에선 100원에 동태 한 마리 하던 것이 광주단지에 와선 100원에 열 마리씩 한다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왜냐하면 서울에선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 상하기 직전인 수산물이 이곳에선 팔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딱한 사정은 그곳 광주공업단지에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구 전체가 다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본당들은 사제들의 생활비도 충당하기 어려워 우리 주교님이 미국이나 유럽에 가셔서 그곳 신자들에게 미사 한 대에 1달러씩(월 30달러) 받고 미사를 봉헌하는 조건으로 동냥(?)을 해오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름 하여 달러 미사입니다. 당시 신자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미사예물조차 제대로 봉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당들은 다 열악해서 성당 건축이나 신설은 말 그대로 억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교구는 성당 터라든지 건축비는 교구로부터 나름대로 지원을 받곤 했는데 우리 교구는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각자 해당 본당의 가난한 신자들만 바라보는 처지였습니다. 또 분당을 할라치면 인근 성당과 함께 성당 터를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본당은 성당 건축을 하랴 분당을 위한 새 성당 터를 마련하랴 말 그대로 억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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