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소 전경.
■ 사리틔 교우촌
확인된 바는 없지만 천주교와 관련된 많은 전설을 가진 사리틔공소, 이 공소의 전신은 원래 초가집이었다. 1866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박해였던 병인박해 이후 호조판서 조일의 손자인 조면(바오로)이 공소를 지으며 초대 사리틔 공소회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초가집이 낡아 장덕호 신부(당시 용인본당 주임)와 함께 1977년 마룻대를 상량하며 기와를 얹었다.
사리틔마을(현재 지명은 서리)은 박해 당시 교우들이 피신해 살던 마을이다. 1791년 겨울 신해박해로 체포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선종하자 그의 자손들이 이곳으로 이사해 살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천주교를 믿는 200여 호의 가정이 이곳에 숨어살았다고 하니 얼마나 후미진 시골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다. 현재 공소회장도 권일신의 7대손인 권혁진(리카르도ㆍ71ㆍ천리요셉본당)씨가 맡고 있다.
▲ 상량 마룻대.
“비가 와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비닐을 덮고 그랬지요. 아이고, 공소 짓는데 비가 오니 어떻게 해. 올라갈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지붕에 올라갔는데 벌벌 떨면서 내려왔지. 교리문답 320조목을 못 외우면 엄한 신부님들은 회초리를 들었다고. 학교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답하는 게 문제지. 그래도 못 외우는 사람이 없어. 거진 다 합격해.”
▲ 반겨주시는 공소 어르신들
사리틔공소에서 여교우와 남교우는 따로 공소예절을 해야만 했다. 아직도 공소에는 여교우와 남교우가 나뉘어 출입했던 문을 찾아볼 수 있으며, 따로 마련된 방에서 고해성사가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철문 옆에는 낡은 철 종탑이, 십자가의 길 14처는 벽에 걸려있고 예수상과 김대건 신부상은 제대 위에 놓여 있다. 불을 때던 가마와 불을 지피기 위해 해다 놓은 장작도 충분히 쌓여 있다.
박해 당시 피난처였던 이곳에는 1950년쯤 묵주와 썩은 기도책이 담긴 항아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박해시절 교우들이 묻어놓은 것으로 보였던 묵주는 잘 보관되지 않아 아쉽게도 사라진지 오래다. 공소예절과 함께 2006년까지 레지오와 성모회를 여는 것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공소는 인근에 성당이 들어서며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도 도시를 떠났고, 마을 어귀에는 공장들이 들어찼다. 하지만 천리요셉본당 주임 임창현 신부가 부임하면서 지난 6월에는 상량 35주년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 예수상.
▲ 김대건 신부상.
■ 김대건 성인과 관련 깊은 유적지들
사리틔공소는 인근 은이성지와는 14km, 미리내성지와는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한덕골 사적지(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와는 7km, 성 이윤일 요한이 대구로 이장되기 전 묻혀 있던 무덤자리와도 그다지 멀지 않다. 김대건 신부와도 관련 깊은 이 성지들과 함께 사리틔 지역 또한 김 신부의 사목활동지 중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증언록이나 정씨가사 등 문헌에는 언급돼 있지 않아 구전으로만 전해들을 수 있을 뿐이다.
사리틔마을의 곳곳은 새로 변경된 주소로 통용되지만, 주민들이 부르는 지명은 천주교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실제로 마을 어귀의 주소는 서리로 137번길이지만 주민들은 ‘신부터길’로 부르고, 길 위로 올라가 위치한 야트막한 동산은 신부터라고 부른다. 또 신부터 왼쪽으로 나있는 고갯길은 박해로 인해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붉은 고개’라고 불린다.
용인버스터미널에서 마을버스 13번을 타고 ‘상반’에서 내리면 사리틔공소에 닿을 수 있다. 배차된 차량이 많지 않으니 주의해야 한다. 자가용으로 오는 신자들은 마을 어귀 상반 마을회관에 주차할 수 있다. 인심 좋은 공소 어르신들 덕분에 사리틔공소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다고 한다.
※문의 031-333-4091 천리요셉성당 사무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 518-1 사리틔공소
◆ 사리틔마을의 붉은 고개
사리틔공소로 올라가기 전 마을 어귀(서리로 137번길)에서 왼쪽 길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신부터’라고 불리는 야트막한 동산이 나온다. 동산 옆으로는 고갯길이 있는데 그 고개를 누가,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나 ‘붉은 고개’라고 불렀다.
천주교 신자나 비신자나 모두가 신부터와 붉은 고개로 알고 있는 이 지역은 나무들이 우거져 산책길로 걷기에 좋은데, 박해 당시 한 성명 미상의 성직자가 거처했던 곳이라 해서 신부터, 그가 전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포졸들에게 잡혀 피를 흘리며 갔다는 이유로 붉은 고개라고 불린다. 또 신부가 사목을 하려고 넘나들었다하여 ‘신부 고개’라고도 부르는데, 1950년대 한 농부가 괭이로 땅을 파다가 기도책과 묵주를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주민들 가운데 몇몇 신자들은 이 성명 미상의 성직자를 페레올 주교로 알고 있는데, 문헌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구전으로만 전해진다. 현재 붉은 고개에는 해광사라는 사찰의 간판이 놓여 있다.
조전우(벨라도ㆍ80)씨는 “조상님들의 얼이 깃들고 목숨을 걸고 믿어온 신앙, 그 신앙이 깃든 곳이 사리틔공소”라며 “앞으로도 잘 가꿔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관심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붉은 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