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담한 교구의 현실 앞에서 우리 신부들이나 신자들은 맥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온 나라가 잘살기 위해서 새마을 운동을 힘차게 펴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새마을 지도자 육성을 중점적으로 하는데, 바로 우리 꾸르실료 교육을 그대로 본떠서 하게 됩니다. 나라는 나라대로 우리 교회는 교회대로 서로 경주를 하는 것처럼 힘차게 전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발안본당 등을 중심으로 평신도 교육을 위한 제반 숙소 등을 마련해 자립의 일환으로 신용협동조합운동, 양잠업 발전 등 농촌발전을 위해 신부들이 함께하는가 하면, 요원의 불꽃을 피우는 꾸르실료 운동, 위기에 있는 가정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보다 멋진 부부성을 키우는 부부 재일치 운동(M.E), 불같은 신앙생활을 위한 성령쇄신운동과 가장 중요한 레지오 마리애 신심운동, 각 순교성지를 중심으로 순교자 신심운동과 성모신심운동(남양 성모 성지)을 전개해 갑니다. 당시에는 신부들의 공식기구도 없었고 그래서 지구모임도 스스로 만들고 신자들을 위한 사목회도 구성해서 조직적인 교회 발전에 최선을 경주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군사독재에 항거해서 기도회도 강행하고 단식기도도 하면서 민주국가를 향한 힘찬 행보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용인에선 주택개량 축산 장려를 위한 운동과 지원 등도 했습니다. 참으로 정신없이 우리는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엔 주교회의에서 반대하던 우리 교구 수원 신학교 건립을 주교님과 몇몇 신부들에 의해서 강행(당시엔 교구 신부들도 반대를 했음)을 해서 결국 원대한 교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그리고 몇몇 신부들(일명 대건회)은 비록 가난했지만 한 푼 한 푼 모아서 용인 쪽에 부동산을 약 1000여 평을 70만 원에 매입해 후배양성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요새 가격으론 약 10억 원은 될 것 같습니다. 당시 70년대엔 사제관비가 월 1만6000원 쯤 됐으니까 우리 선배 신부들이 얼마나 알뜰하게 살았고 미래를 바라보았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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