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한결같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체 왜 걸어요?”
그리고 우리도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게요. 미쳤나 봐요.”
8박9일의 청년도보성지순례. 길을 걷기 전 신청서를 낼 때 이미 알았어야 하는 걸어야 하는 이유를 길 위를 걸으면서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새 운동화 사줄게”라는 달콤한 유혹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더 늙어서 걸으면 실려서 돌아오게 될 걸”이라는 장난 섞인 협박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신청자 명단에는 제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갈 때는 혼자지만 돌아올 땐 애인이랑 둘이 돌아와”라거나 “살 한 5kg만 빼고 와”라고 이야기할 뿐이었죠. 그렇게 별생각도 없이 길 위에 섰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씩씩한 척 했지만 매일이 고비였고, 날마다 한계였습니다. 발에는 물집이 잡혔고 무릎이 욱신거려 앉고 설 때마다 지옥을 맛보았습니다. 위대하신 ‘멘소래담’님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견뎌 나갈 때 내 손위에는 스태프분들이 정성으로 만들어준 묵주가 쥐어졌습니다.
묵주 알을 하나씩 굴릴 때마다 울던 아이 손에 딸랑이를 쥐여주면 울음을 그치듯 내 마음속 울부짖음도 잔잔해져 갔습니다. 단, 첫째 날 정성스러웠던 기도는 길이 길어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질수록 속도가 빨라져 LTE가 됐고 지금 내가 바친 기도가 1단인지 2단인지, 이제 막 태어나신 예수님이 돌아가시지도 않은 채 부활하시더니 부활하자마자 세례를 받으시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던 그 순간에도 입에서는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이 외워졌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도 주님을 찾고 성모님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함께하심을 느끼게 되면서 함께 걷는 이들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물집에서 고름과 피가 터져 나와도 조원의 등을 밀어주고,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을 때도 다른 이의 짐을 대신 들어주고 목이 타 죽겠는데 내 물을 건네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던 사람들. 그렇게 우리는 점차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순례동반자가 돼 있었습니다.
누군가 “왜 이 길을 걸었느냐”고 다시 묻는다면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같이 돌아갈 애인도 없고, 다리의 살도 그대로이고, 딱히 주님의 사람다운 어여쁜 사람이 되지도 못했지만, 이 길 위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 때 묵주를 손에 쥐기만 해도 된다는 것, 무너져 내릴 듯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주님의 이름을 찾고 엄마, 성모님 이름을 그저 한번 부르면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어렵게만 느껴졌던 기도이고, 그 기도가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길을 걷는 동안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어깨를 다독이는 그런 좋은 친구들을 내 곁에 주셨듯 살아가는 동안 함께 기도할 선물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그 깨달음이 아마도 제가 이 길을 걸었던 이유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생이라는 각자의 길 위로 돌아갑니다. 그 길에서는 오르막길에서 앞으로 밀착해야 하는 것처럼 힘들 일이 닥쳐오고 한 번에 벌침을 10방 쏘인 것처럼 아픈 순간들도 올 것입니다.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 말하고 싶지만 분명 또 울게 될 것입니다. 또다시 무너지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주님 이름 부르면서 걸으면, 그 길이 바로 순례의 길이고 나는 굳건한 순례자가 돼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울면서도 씩씩할 겁니다.
스태프분들, 신부님,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사람, 앞서 걸으시며 우리 신앙의 길을 닦아주신 순교자분들, 그리고 12기 도보성지순례자들. 덕분에 잘 걷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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