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1950년 프랑스 신학교에서 한 교수가 ‘큰일났다’며 울고 있었다. 과거 한국에 있었던 그 사제는 한국전쟁을 걱정하고 있었다. 날마다 프랑스 지역신문 1면에는 한국지도와 전쟁기사가 실렸다. 1953년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에 파견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최세구 신부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전쟁을 하고 있던 아시아의 작은 나라였을 뿐이다.
“신학교 성당에 전쟁 중 돌아가신 프랑스 신부님들 명단이 붙었지요. 그래도 나는 왠지 일본에 가긴 싫었어. 나더러 한국으로 가라고 하는데 다들 ‘죽으러 가냐’고 물었지만 일본에 안 가게 돼서 나는 그저 좋았지.”
배를 타고 프랑스에서 출발해 지중해와 스위스 운하, 홍해를 건너 다시 인도양, 스리랑카, 싱가포르, 베트남, 홍콩, 일본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전쟁이 막 끝을 맺은 터라 당시 부산에는 상자로 겨우 바람을 가린 집들만 즐비했다. 최 신부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어 선생은 대구대교구 제2대교구장 문제만 주교가 종군 신부로 재임할 때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이였다.
“바둑아, 이리와, 영희하고 같이 놀자. 달아, 달아, 둥근 달아. 이런 것들만 배웠지 뭐. 한국어 배우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 당시에 사전이 있나, 문법책이 있나. 6개월 동안 가나다라만 배우다가 논산으로 갔지.”
당시 충남지역이 서울대목구로부터 분리돼 독립 포교지가 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는 대전포교지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는 논산본당에서 보좌로 일하며 아이들과 어울려 한국말을 배웠다. 한국전쟁 기간에 체포된 신부들이 많아 성당에서는 사제가 필요했다. 이후 금사리·홍산·합덕·성남동 등 대전지역의 본당을 두루 거치고 1969년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이 된다.
“방인 신부들이 대전지역에도 많아졌어요.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당시 나길모 주교님이 도시가 커지고 교우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해서 ‘아, 내가 가야 할 곳이 인천이구나’ 생각했지요. 그래서 주교님께 말했어요. ‘주교님, 저를 써보시려면 써보십시오.’”
인천지역에서 그는 간석4동, 십정동, 소사3동 등 여러 성당을 지으며 주임을 역임했다. 공소와 강당까지 합치면 전국에 그가 지은 가톨릭 관련 건물들은 손가락으로 채 꼽기 어려울 정도다. 1990년 성모자애병원, 1997년 수원 평화의 모후원 양로원 원목 신부를 거쳐 그는 최근 수원교회사연구소에 둥지를 틀었다.
▧ 마지막으로 쏟는 혼신의 힘
지난해 수원교구가 펴낸 ‘앵베르 주교 서한’의 감수를 맡은 것도 최 신부였다. 책은 제2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사목한 앵베르 주교의 서한을 판독 및 역주한 것인데, 최 신부는 원본과 자필본, 타자본 등을 하나하나 꼼꼼히 대조하며 빨간 펜을 들어 수정했다.
현재 둥지를 튼 수원교회사연구소의 소장 정종득 신부와는 2010년 만났다. 평화의 모후원이 내부를 개조함에 따라 거처할 곳이 없어지자 정 신부가 그에게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번역 일을 부탁한 것이다. 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가 최 신부를 선뜻 추천할 만큼 그는 프랑스 고어와 교회사를 두루 알고 있는, 교회사 연구에 적격인 인물이다. 현재 그는 굵직한 주요 교회사 자료들을 번역 및 감수하고 있다.
▲ 1953년 최세구 신부가 한국에 들고온 나무로 된 가방.
▲ 최세구 신부는 편지봉투를 모아 이면지로 활용한다.
“2년 전 몸이 너무 아파 프랑스에 갔었는데 파리외방전교회 양로원에 있었어요. 그런데 하느님도 놀라우시지, 나아버렸지 뭐야. 한국은 오랫동안 내가 살아온, 힘을 써온, 보람이 있는 그런 곳입니다. 한국교회에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게 만족스러워요. 교회사 번역,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제 이것밖에 없어요.”
최 신부가 돋보기를 다시 들이댄다. 60년 전, 한국교회를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고 한국땅을 찾아와준 그는 나뭇가지와 열매, 나무기둥과 나무 그루터기마저 내어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꼭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