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염 속 영등포 쪽방촌
서울 영등포역에는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음성이 요란했다. 영등포역 6번 출구, 문래고가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자존심 유지비 200원을 내고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노숙인 급식소 토마스의 집과 무료진료소 요셉의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요셉의원과 맞대고 있는 좁은 골목, 그곳에 영등포 쪽방촌이 있다. 줄잡아 250~300여 가구가 살고 있다는 이 쪽방촌에 폭염사태를 맞아 수많은 매체들이 다녀간 모양이다. 태양에 한껏 달궈진 슬레이트 지붕을 이은 판잣집에서 밖으로 나온 한 남성이 쓴맛을 다시며 ‘무엇 하러 왔느냐’고 묻는다.
“여기 사람들이 안 그래도 허약해요. 폭염사태에 노인들을 비롯해서 몇몇이 인근 보라매 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매일 와서 방송하면 뭐해, 뭐 하나 바뀌는 것이 없는데. 더위 피해서 피서 갈 형편이나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집으로 들어갈 때, 쪽방촌 사람들은 집을 나선다. 몸 하나를 간신히 누일 한 평 남짓한 집보다는 집 앞 시멘트 바닥이 훨씬 시원하기 때문이다. 밖에 나와 시간을 보내다보면 자연스럽게 술을 찾고, 술에 취해 더위를 잊는다.
한 가정의 오래된 선풍기가 고개가 부러질 듯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선풍기에서 내뿜는 열기 때문에 그마저도 두 시간을 채 켜지 못한다. 쪽방촌 인근에 위치한 광야교회에서 ‘올해는 너무 더우니 무더위 쉼터를 운영한다’는 종이를 여러 군데 붙여두었지만 사람들은 삼삼오오 거리에 모여 앉아 있다.
“이렇게 더운 건 처음 보네. 내가 느끼기로는 30년만인 것 같아. 정부에서 아리수 350ml 2병 갖다 주고 그래서 그 물 먹고 그냥 그러고 살아. 선풍기 끄고 밖으로 나왔어. 대책이 있으면 좋지마는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 여름만 힘든가? 겨울도 마찬가지지.”
한 노숙인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쪽방촌을 방문한 박경옥(데레사·53·토마스의 집 총무)씨에게 자신도 모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우물거린다. 노숙인이 쓰러질 듯 돌아나간 경인로 96길 골목 어귀에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박노해 시인의 시 한 구절이 파란색 벽에 적혀 있다.
▲ 쪽방촌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삼삼오오 거리에 모여 앉아 있다.
▲ 자존심 유지비’ 200원을 내면 노숙인 급식소 토마스의 집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 경인로 96길 골목 어귀에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박노해 시인의 시 한 구절이 파란색 벽에 적혀 있다.
■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
더위를 피해 토마스의 집에서 한 끼 식사를 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 이날만 378명을 기록했다. 좁고 더운 집뿐 아니라 냉장고도 채 구비하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쪽방촌 끝자락, 50여년을 쪽방촌에서 살아온 이 모니카(82·영등포본당) 할머니의 집에 들러 이야기를 나눈다. 할머니는 이곳의 산 역사다.
“말도 못하게 더웠지. 선풍기 하나 갖고 살았어. 이렇게 더운 것이 이번이 처음이야, 처음. 차라리 지난해처럼 비가 오는 게 낫겠네. 그래도 주일마다 빼먹지 않고 성당에 간다우.”
다른 쪽방보다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모니카 할머니의 방에는 텔레비전과 선풍기, 이불, 먹다 남은 멸치볶음과 약 봉지, 십자가, 성모상이 있다. 심장질환과 중풍, 뇌혈관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할머니에게는 남아있는 가족이 없다고 했다.
“너무 더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선풍기를 24시간 켜놓아도 하나도 안 시원해. 그럴 때는 자다가도 기도를 해. 무슨 기도냐고? 하느님 앞으로 빨리 가게 해달라고. 주님이 부르면 가야지, 별 수 있나.”
할머니는 토마스의 집에서 10년 남짓 관리 봉사를 했고, 지금까지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본당 구역 반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할머니의 말이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할머니의 집에서 쪽방촌을 돌아 나오는 길, 박경옥씨가 술에 취해 거리에 누운 남성을 ‘아무리 덥고 술을 먹었어도 일어나야지’ 하며 흔들어 깨운다.
“쪽방촌에는 자연재해가 늘 큰 어려움인데 토마스의 집도 넉넉하지 못하니 도움의 손길이 한계가 있어요. 봉사하기 전에는 저도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몰랐지요. 가슴이 아파요. 퀵서비스, 트럭 운전하시는 분들이 부끄럽다며 만원씩 주고 가기도 하는데. 오히려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이 베풀어요.”
어쩌다 동네사람과 말다툼이 일어나도 영등포 쪽방촌 사람들은 박씨의 편을 들어준다. 얼마 전에는 덥다고 없는 돈을 쪼개 까만 비닐봉지에 아이스크림 10개를 담아 가져오기도 했다. 더우나 추우나 한 끼 식사라도 왕처럼 하길 바라는 무료급식소 총무 박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제가 입술과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생각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많이 해요. 이분들에게 음식만큼은 제 손으로 해서 드리고 싶어요. 제게 가끔 표현해주시는 호의를 보면서 절 정말 사랑하시는 것을 느껴요.”
서울 영등포역에 다시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음성이 요란하다. 폭염을 뚫고 열차가 시원하게 달린다. 영등포 쪽방촌을 쉴 사이 없이 지나는 그 열차가 행복의 열차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다.
▲ 50여년을 쪽방촌에서 살아온 이 모니카 할머니에게도 올해 무더위는 낯설기만 하다. 방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낡은 선풍기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뜨스한 바람만 흘려 보내고 있다.
▲ 더위와 술에 취해버렸다. 한 노숙인이 쪽방촌 입구로 향하는 요셉의원 외벽 옆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 쪽방촌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삼삼오오 거리에 모여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