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을해(乙亥)년, 새해 새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다소 느려보이고 조금은 지쳐 보이긴 해도 새해 새날의 태양은 도도히 그러면서도 유유히 대지의 어둠을 몰아가고 있다.
지난해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쓰리고 아프게 했던 수많은 사연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마디 내색도, 아무런 표정하나 없이 새해 첫날은 우리들 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러면서 이 새 날은 우리에게 금년 한해는 어떤 그림을 그릴것인지 우리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각자 붓을 들고 새날의 새하얀 백지위에 그림그리기를 시작해보자.
그림을 시작하기전에 꼭 한가지 명심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94년과 같거나 비슷한 그림은 절대로 그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뇌리에서 다시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것이 94년도 그림이다. 전쟁과 폭력과 기아와 질병으로 얼룩진 세계화(世界畵)도 보기 흉하지만 국내화(國內畵)는 그 어느해보다 흉칙스런 몰골이 많이도 그려진 한해였다.
그중에서도 도피성 해외유학까지 시키며 자식의 장래를 열어주려했던 부모가 백억원대의 유산을 성급히 차지하려는 바로 그 자식한테 무참히 살해당해 불태워진「박한상그림」과 가칭 살인공장까지 차려놓고 거들먹거리는 부유층을 제거하려한 20대의 살인조직이 무고한 시민을 4명씩이나 살해한「지존파그림」은 94년 최고의 악화(惡畵)였다.
이 두 그림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들도『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경악과 분노와 강한 수치심을 느껴야 했다. 천륜(天倫)도 인륜(人倫)도, 도덕도 질서도, 가족도 가정도 모두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린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특히나 94년이 유엔과 우리 교회가 정한 「가정의 해」로서 그토록 가정에 대해 강조하고 또 했건만, 그 어느해보다 비(非)가정ㆍ반(反)가정ㆍ탈(脫)가정을 경험한데는 아연할수 밖에 없다.
이와 더불어 수도 한복판에서 다리가 끊어지고 가스가 폭발하고 유람선에 불이나 수많은 사람이 살상한것은 마치 이 새대의 죄악과 타락상이 그와같은 희생양들을 필요로 할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일깨워주는듯 했다.
이제 우리는 지난해의 흉화(凶畵)들은 우리 곁에서 말끔히 치워버려야 한다. 옆에 얼씬도 못하게 해야한다. 아니 완전하게 봉인해 영겁의 역사속으로 흘려보내야한다. 그리고나서 새 그림을 그려야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올해는 우리나라의 광복5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며 6월부터는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를 개막하는 여러 선거가 실시되는 해이기도 하다. 뿐아니라 정부가 세도(稅盜)들과 복지부동(伏地不動)의 공직사회를 척결하고 세계화를 추진하기위해 전면개각을 단행, 어느때보다 결의와 각오를 다지고 있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 교회로서는 교회본연의 사명인 복음화, 그중에서도 복음화의 출발점이자 원동력이 되는 가정과 본당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있다.
군종단을 포함한 전국 15개 교구장들이 95년도 사목지침으로 한결같이 가정과 청소년 본당공동체의 결집과 강화에 역점을 두고있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중요성과 동시에 아직도 그 기반들이 안정되지 못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전국평협은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도덕성회복운동을 적극 전개해나갈 계획이다. 이 운동은 한마디로「인간 제모습되찾기」운동으로서 그 성패여부에 따라 우리사회의 내일이 판가름날 수 있다.
이 운동과 관련해 사전에 꼭 알고 대처해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3분의2 이상이「법과 질서를 지키면 손해볼때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난해 12월 공보처가 성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세계화관련 국민질서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93.5%가「법질서는 준수해야 한다」고 답했지만, 72.2%가「법과 질서를 지키면 손해볼때가 많다」고 응답한 것이다.
따라서「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득볼때가 더 많다」는 쪽으로 제도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진정한 도덕성의 회복도, 인간 제모습 찾기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유엔은 금년을 인종과 민족간의 갈등,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종교적 과격주의등의 부활에 대한 우려에서 이들을 불식시키기 위해「관용의 해」로 정했다. 이 관용은 우리 교회의 덕목중 가장 뛰어난 것중의 하나로 우리 교회가 금년중 더욱 솔선해야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교황 성하는 1월 1일 세계평화의 날을 맞아 발표한「여성, 평화를 가르치는 교사들」이란 메시지에서 『인간존엄이 사회의 모든 차원에서 증진되고 이 존엄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하고『여성들이 전존재를 걸고 모든 행동에서 평화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되라』고 호소하셨다.
이제 우리 각자는 95년 한해를 화폭에 옮겨담을 여러가지 배경과 재료들을 손에 쥐고 있다. 과연 나는 어떤 구도로, 어떤 재료들을 사용해 무슨 그림을 그릴 것인가? 선택은 자신이 해야 한다. 자, 이제부터 나의 그림그리기를 시작하자.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