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새해는 교회적으로 희년의 의미를 지니는 광복50주년을 맞는다는 점에서 어느때보다 통일에 대한 희망과 바람이 가득해질 전망이다. 또한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관용과 화해가 강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유엔은 올해를 「세계 관용의 해」로 설정, 화합과 사랑을 호소하고 있다. 광복50주년을 맞아 분단과 통일, 화해와 갈등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판문점을 찾아가서 통일에 대한 7천만 민족의 염원이 무엇인지 현장에서 확인해 보고 관용의 마음이 판문점을 중심으로 북으로 또 남으로 번져가길 기원해본다
삼팔선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군사분계선이라는 이름으로 남과북이 갈라진지 어언 50년. 이세상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단 한가지 남북을 가로 지르고 있는 1백55마일 휴전선만은 에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휴전선상의 서쪽 끝편. 서울 서북쪽62km,평양에서 남쪽으로 2백15km지점에 위치한 단 한곳만은 평화와 화해, 희망의 상징으로 7천만 민족의 염원과 시선이 쏠려있다. 바로 남북의 유일한 관문, 판문점이다.
냉전구도의 현장이라는 자랑스럽지 못한 이름이 말해주듯 대결 대화 희망이 뒤엉킨 이곳 판문점은 12월말의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평화의 기운은 썰렁하기만 하다.
서울에서 시원스레 뚫린 자유로가 개성을 거쳐 평양,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1번국도로 이어져야 하지만 임진각 자유의 다리 앞에서 멈추고 만다. 분단의 세월만큼 쌓여온 앙금을 누구도 허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으로 향한 유일한 통로, 임진각 자유의 다리를 건너가면 동족의 허리를 싸매고 있는 매듭인 판문점과 만나게 된다.
전후 좌우거리가 8백m에 불과한 좁은 공간, 동족상징의 포성을 멎게 한 이후 줄곧 민족의 한과 아픔의 대명사로 치부됐던 판문점. 그러나 판문점에 들어선 첫 느낌은 「동서냉전의 유일한 현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내에 설치된 작은 연못 주위에서는 청소를 하는 아낙네도 보였고 외국인들이 팔짱을 끼고 깔깔 거리고 웃기도 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 주느라 야단을 떠는 모습은 흡사 관광지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전북지역에서 각급학교 교장단의 일행으로 이곳에 견학을 온 김영우씨(56)세는 판문점이 우리와 관계없이 북한군과 유엔군의 관할하에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시작과 끝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전쟁, 승자도 패자도 없던 전쟁의 산물로 판문점이 파생됐고 그후 줄곧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판문점은 존속돼온 것이다.
현재 판문점에는 24동의 크고작은 건물들이 들어서있고 중심부에는 동서방향으로 일곱채의 단층 콘셋트 막사가 일렬로 서 있다. 이중 한가운데 서 있는곳이 군사정전위원회회의실이고 그 왼쪽이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이다.
회담장내 모든 건물은 유엔측과 북한측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건물과 어느 한쪽이 독점적으로 이용하는 건물로 구분되고 있다. 색깔로 구분되는 이건물은 유엔측은 파란색 3동을 북한측은 회색의 4개동을 관리한다.
특히 이곳에서 남과 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은 역시 남쪽의 자유의 집과 북쪽의 판문각이다. 이 두곳은 남북간의 필요한 연락업무를 원활히 하기위해 쌍방의 적십자사가설치하고 직통전화 2회선을 연결해 놓았다.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는 남의 자유의 집과 북의 판문각 뒷편에는 쌍방이 회담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해 놓은 평화의 집과 통일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무엇보다도 남북분단의 엄연한 사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판문점내의 군사분계선. 이 군사분계선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실내에 놓여있는 장방형 회의용 탁자 한가운데로 지나고 있는 마이크선으로 갈라진다. 회담장밖에는 너비50cm, 높이 5cm의 시멘트로 구분돼 있고 건물구역을 벗어나서는 높이 1m의 흰색 말뚝을 10m간격으로 박아 구분하고 있다.
판문점을 찾는 방문객중에는 정전위 회의실에서 북측의 땅을 호기어린 마음으로 밟아 보기도 한다.
황해도 사리원에서 살다가 부모와 여동생을 남겨두고 형님과 단 둘이서 월남했다는 이성호씨(64)는 북한 측 경비병에게 고향에 계실 부모님의 안부라도 알수 없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은 물론 눈짓도 하지 말라는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 단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몇마디 말을 건넸다가는 북측에서 좋지않은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안내자의 설명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이 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분동의 자세로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는 양측 경비병들의 차가운 눈초리 속에서 이곳에 감도는 긴장과 남북대치의 삼엄한 분위기를 실감케 된다.
남측 제5초소 전망대에서 보면 판문점과 경계를 이루며 사천강이 흐른다. 한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콘크리트 몸체만을 드러낸채 앙상하게 서 있다.
판문점 내의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와는 달리. 판문점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주민을 상징하듯 두개의 마을이 존재한다. 남쪽은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고 북쪽은 기정동 평화의 마을이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직선거리로 118km 떨어져 있는 셈이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전쟁 이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마을로 43세대 2백24명의 민간인이 군의 보호를 받으며 농사를 짓고 있다.
반면에 북측의 평화의 마을은 위장마을로 정찰병력 외에 단 한명의 주민도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마을입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붉은 깃발의 북한 인공기가 1백60m 높이로 걸려 있는데 가로 30m 세로 14m의 이 인공기는 넓이만 1백30평에 달한다.
군사정전위원회의 남북고위급 회담, 적십자 회담, 체육회담 등 수많은 회담이 열렸던곳, 남북됐던 어부가 송환되고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건 망명로가 되기도 했던 곳.
그러나 판문점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회담장안의 탁자위를 가로지르는 남북의 분계선이 인위적인 경계선일 뿐, 우리 민족이 숙명처럼 받아 들여야 할 장벽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전선속에 우리의 말과 생각이 흐르는 것처럼 점차 남북 분단의 장애물도 하나 둘씩 걷혀 지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리라.
이제 판문점은 더 이상 갈등과 반목의 상처가 아닌 통일을 향한 발판으로서 관용과 화해, 사랑을 키워가는 심장으로 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분단의 장벽을 헐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마치 니느웨의 사람들이 요나의 경고를 듣고 재를 뿌리며 회개하여 구원을 받은 것처럼 서로를 탓하기보다 진정한 회개의 마음으로 통일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철책선이 민족의 허리를 가르고 있을지라도 7천만 민족의 염원까지는 막을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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