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세속 통치권은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서방의 마지막 황제들의 세력이 약해지고 로마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의 대부분이 교황청과 결속되었으며 5세기의 프랑크족 왕들로부터 9세기의 카알(Karl)대제(大帝)에 이르기까지 로마 교황을 보호한다는 서로의 합의에 의해 점차로 확대되었다.
그후 교황령(敎皇領)은 귀족들의 야망과 소란, 로마에서의 민중봉기, 대제후(大諸候) 정복가들의 찬탈, 아비뇽 유폐, 서구의 대이교,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패권 다툼 등으로 늘 위협을 받아 왔었다.
원기 왕성한 보르지아(Brogia) 가문 치하의 교황들, 율리오 2세 교황(1503~1513), 식스도 5세 교황(1585~1590) 치하에서 교황들의 세속권력을 결정적으로 인정한 것은 교황청의 권위를 더욱 정치적으로 행사하게 하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어느 누구로부터도 위협받지 않고 교황령 안에서 누린 괄목할만한 안정과 평화가 교황의 세속권력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게 하였다. 비오 6세(1775~1799)와 비오 7세 교황(1800~1823)이 희생자였던 교회에 대한 그간의 여러 박해는 로마 주위에 교황 세속 권위의 합법성 사상을 강화하게 하였다. 로마궁정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교황 통치가 기본적으로는 아주 적절하고 온건한 것으로 보였다.
19세기의 혼란상태는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교황령들도 그 당시의 혼란상태에 휘말리게 되었고 프리 메이슨(Free-Masons) 비밀결사단(Massoneria), 까르보네리아(Carboneria) 비밀결사단 등 반교황청 세력들의 표적이 되었다. 교황들의 세속권력은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에 심각한 방해로 간주되었다. 비오 9세 교황(1846~1878)은 재위 초기에 자유주의적이고 애국적인 정책을 실행하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즉 1848년 3월14일 교황령에 헌법을 부여하고 이 법에 따라 백성들의 어느정도 정치에 참여할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848년 11월 민의원 의회 개회식에서 교황령의 초대 수상인 뺄레그리노 롯시(Pellegrino Rossi) 백작이 과격파 혁명가들에 의해 살해당했을때, 교황은 가에따(Gaeta)로 피신할수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로마에서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그의 개혁정책은 포기될수 밖에 없었다. 교황청은 반란과 폭동을 진압하고 기존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프랑스 군대의 힘에 의존하여 로마와 교황령을 탈환하고 이전의 전제군주 체제로 돌아갔다. 그러자 빅토리오 엠마누엘(Cittorio Ema-nuele, 1849~1878)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더욱 확산되었다.
이후 프랑스 군대의 점령으로 로마만 겨우 보호된채 교황령이 차례로 점령되었고 엠마누엘은 1861년 3월 피렌체(Firenze)에서 자신을 엠마누엘 2세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포하였다. 보불전쟁(普佛戰爭, 1870~1871)으로 프랑스 군대가 본국으로 회군하자 1870년 9월 20일 로마가 점령됨으로써 교황령은 1천여년만에 종식되었다.
비오 9세 교황은 현실을 직시하고 가능한한 전쟁을 피하도록 노력하면서 끝까지 저항하였다. 엠마누엘 2세 왕이 그에게 제안한 타협을 거부하고 스스로 「바티칸의 유폐(幽閉)」생활을 하였다. 비오 9세 교황이 왜 역사의 거역할 수 없는 운동으로 나타난 시대의 흐름을 거스려 현세적인 주권의 원칙을 방어하려고 그렇게도 저항했을까? 비오 9세 교황과 그 후계자들이 보여주었던 완고한 저항은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납득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다.
그 당시까지 교황령은 성좌(聖座)가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물질적ㆍ경제적으로도 다른 모든 세속 권력과의 관계에서 독립을 보장하였다. 그러한 교황의 세속권위가 아주 좁은 영토에 불과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통일운동 세력들은 교황이 교황령에서 행사하였던 모든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교황권을 철저히 강탈하려 하였다.
1929년 로마의 라떼란궁에서 비오 11세 교황(1922~1939)은 뭇솔리니와 합의하여 신앙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맡겨진 양떼들을 지도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과 이에 상응한 주권국가의 원수로 인정받은 이른바 라떼란조약을 체결하였다.59년이 지난 이후 맺은 조약은 비오 9세가 그렇게도 저항하였던 까닭을 이해하게 하였고, 이 협약에 의해 그 면적이 0.44km에 불과한 왜소한 바티칸 시국(市國)이 탄생하게 되었다.
전문(前文)과 27개 항목으로 구성된 이 조약에 의하여 교황은 로마의 4대 대성전(성 베드로, 성 바울로, 라떼란, 마리아 대성전)을 비롯한 몇개의 대성당과 로마시에 산재한 교황청 여러 성성(聖省)의 행정청, 그레고리안 대학, 우르바노 대학, 까스델간돌포별장 등을 바티칸 시국 소유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하고 기존 교황령 내 소유물의 손실에 대하여 보상하는 재정적인 문제에 합의하면서 기존의 교황령을 포기하였다.
이제 교황이 세속권력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행사할수 있었던 교황령을 포기하고 오로지 그리스도교의 수장으로서 그 사명과 직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만은 확보하는 것으로 양보하였다. 이로써 과거 교황령이라는 한정된 영토의 권력자라는 걸맞지 않은 직분에서 해방되어 명실상부하게 신앙과 도덕의 전세계적인 지도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교황의 권위가 종교와 이념, 민족과 국가의 정치체제의 한계를 넘어 확대된때가 언제 있었는가? 세속권력을 포기한 그만큼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황의 권위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가르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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