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론편 게재순서>
①민족의 분단과 통일 그리고 한국천주교회
조광 교수
②현대 한국교회의 성장과 그요인
오경환 신부
➌현대 한국교회의 성장과 지배 이데올로기
노길명 교수
④현대 한국교회의 성장과 민족문화
최석우 신부
8ㆍ15광복 이후,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나타내면서 한국사회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쳐왔다. 특히, 7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전개한 수많은 활동들은 한국사회의 정치적 또는 사회적 변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교회의 제반활동은 제도교회가 설정한 특정의 가치와 원리에 토대한다. 또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성원들이 나타내는 활동들로 우선적으로는 제도교회의 가르침과 사목방침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제도교회는 관념적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활동하는 인간들의 모임이며, 상대적으로 안정된 계급적 위계구조를 갖고있는 하나의 조직체이다. 따라서 제도교회에서도 권력과 노동의 분화가 존재하며, 교회의 지도층은 교회 조직체의 안정과 교회가 추구하는 목표의 효율적 달성을 위해 특정한 가치나 원리들을 창출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가치나 원리는 공식화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비공식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8ㆍ15광복 이후 한국교회가 전개하였던 수많은 활동이나 한국교회의 사회적 영향력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사목활동이나 사회정책 전반에 흐르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구조적 성격 내지는 세계관을 분석하는 기초적 작업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에는 다양한 가치, 다양한 사회의식들이 공존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사목정책과 사목활동에서 지배적으로 작용하였던 이데올로기는 반공주의ㆍ발전주의ㆍ안정주의의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
한국교회에서의 반공주의는 광복 이후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형성ㆍ강화되어 온 한국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였다.
보편교회로서의 가톨릭교회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유신론 대 무신론, 정신주의 대 물질주의, 창조론 대 진화론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통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무신론적 반(反)종교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보편교회의 반공주의적 입장은 1920년대부터 여러 교황의 회칙이나 교서들을 통하여 이미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덧붙여 러시아의 회개를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하는 파티마 성모발현시의 메시지 또한 한국교회의 각별한 성모신심과 결합되면서 반공주의를 형성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해방정국을 거치면서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세계체제의 변화와 한국에서의 남북분단이라는 사회적 여건과 결합되면서 보다 가속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정체제에로의 양극화와 특히 동구라파 공산정권의 교회탄압,그리고 북한에서 교회가 받은 수난과 핍박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반공주의적 태도를 보다 철저하게 고수토록 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해방정국을 이끌어갈 지도자의 추천의뢰를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한 미군정과 한국교회와의 유착,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이미 외교사절을 파견한 교황청의 대한(對韓)정책,한국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미국 메리놀회 소속의 초대 교황사절 번(PㆍJㆍByrne) 주교의 활동 등과 연결되면서 친미(親美)반공주의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친미반공주의는 북한교회의 초토화와 월남한 신자들의 철저한 반공의식,그리고 6ㆍ25전쟁과 전후 복구사업에서의 미국의 결정적인 지원과 후원 등으로인해 한국교회의 중요한 사회교리로 정착되었다.
친미반공주의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지지토록 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하나의 민족 내에 두 개의 국가라는 분단의식의 조장과 민족의 이질화에 적극 동조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발전과 역할을 크게 제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즉, 남한만의 반쪽교회를 전체교회인양 생각하면서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를 포함하는 북한교회를 단순한 선교나 지원의 대상인 것처럼 인식토록 만들었으며, 외세의존적 외래문화의존적 성향을 교회내에 불어넣음으로써 한국교회의 자주적인 성장과 복음화의 토착화를 저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성장 이데올로기
한국교회에서의 성장주의의 등장과 정착은 지배계급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관철시켜나온 과정과 그 시기가 일치한다. 60년대 초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집권세력들은 자신들의 취약한 권력기반을 소위 「조국의 근대화」를 통해 확보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경제성장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성장과 발전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창출하여 그것을 강력히 관철시켜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제개발정책의 강력한 추진은 산업화 및 도시화와 연결되면서 부락이나 친족과 같은 기존의 전통적인 공동체들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물질주의ㆍ물량주의ㆍ경쟁주의ㆍ업적주의 등과 같은 가치들을 사회에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단군이래의 대변혁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이러한 사회 변동은 기존의 가치 권위집단 등을 약화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나 신앙공동체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종교적 시장성의 호전은 한국종교들로 하여금 양적팽창을 위한 무한 선교경쟁에 돌입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각 종교의 신자 증가율은 국가의 경제 성장률과 거의 비슷하게 맞물려 나아갔다. 한국교회 또한 「민족의 복음화」라는 가치 아래 신자의 증가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에 의해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은 점차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1974년, 한국교회의 신자수는 교회 창립 이후 1백90년만에 1백만명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1백만명을 넘어 2백만명에 도달하기까지는 불과 1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신자 수가 다시 1백만이 증가되어 3백만을 돌파하기까지는 겨우 7년이 소요되었을 뿐이다.
한국교회의 급속한 양적성장은 단순히 신자 수효의 증가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교회의 물적 및 지적 차원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부수적인 측면도 포함되고 있었다. 교회의 구조와 물리적 시설은 점차 대형화되는 한편, 신자들의 계층구성은 중산층 중심으로 형성되어 나아갔다. 이러한 교회의 대형화와 중산층화현상은 주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대도시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교구간 지역간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교회의 급속한 양적 팽창은 그에 따른 신앙의 질적 문제와 함께, 교회행정구조의 관료제화와 소외계층의 포용문제 그리고 소공동체의 중요성 등 새로운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이에 덧붙여, 성장제일주의의 확산은 교회 내에서도 물질주의ㆍ물량주의ㆍ업적주의ㆍ경쟁주의 등과 같은 사회적 가치관을 부추기는 동시에 교회 스스로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 자족토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80년대에 한국 교회가 치루었던 각종 해상의 대형화와 물량화는 한국교회가 자신의 성장을 사회적으로 과시하는 한편, 자신이 자긍심을 표출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안정 이데올로기
한국교회에서 안정주의가 등장한 것은 박해시대가 끝나면서부터였다.한국교회의 오랜 박해 체험과 교회 지도자들의 성속 이원론적 신앙은 교회의 안정과 선교의 자유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정치 권력과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활동은 억제코자 하는 태도를 갖게 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민족사의 대변혁과정에서 교회의 역할과 기능을 스스로 제한하는 요인이 되어 왔다.
한편 7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교회의 중산층화 현상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안정주의적 태도를 더 한층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여러 사회조사를 통해서도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교회 신자들의 경제적 사회적계층 수준은 한국인의 평균 수준보다도 훨씬 높으며 교회활동에서 지도급 위치에 있는 평신도들은 자신이 소속된 직장이나 사회 집단에서도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계층구조는 중산층의 정치적 성향과 결합되면서 한국교회의 성향을 특징짓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일반적으로「안정 희구세력」으로 불리워지기도 하는 신ㆍ구 중간층 집단들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정치과정속에서는 탈 정치화 탈이데올로기화 된 권력동조집단으로 존재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들은 기존체제의 질서위에서 현재와 같은 부(富)와 권력을 향유하기 때문에 기존체제의 급격한 변화를 기피한다. 종교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엄격한 정교분리를 지지하면서 기존체제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옹호하는 동시에 자신이 취득한 부를 신의 축복으로 연결시키는 성향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중산층의 정치적 종교적 성향은 한국교회에서도 별로 큰 차이없이 나타났다. 한국교회가 친미반공주의를 오랜 기간 유지시켜 올 수 있었던 것이나, 70년대 이후 진보그룹에 의해 전개된 사회정의구현운동과 반독재투쟁 그리고 통일운동이 교회내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정치참여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러한 활동들을 주도하였던 교회단체들의 상당수가 교회지도층으로부터 소위 「비인가단체」라고 규정받기도 하였던 것은 안정 이데올로기가 한국교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음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구조적 성향은 젊은 층이나 비판적 지식인들이 설 자리를 제약하며,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대항 이데올로기
한국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서 현실주의에 토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보편교회로서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형성한 사회교리와 세계 선교정책, 한국교회의 역사적 체험과 전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사회의 변동 양상과 그 성경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나타난 하나의 결정체였다.
한국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정리될 수 있는 반공주의와 성장주의 그리고 안정주의는 한국사회의 지배계급이 지배질서의 정당화를 위해 창출한 세속적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지배 이데울로기는 별로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선교정책과 사회활동은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전개되었던 것은 아니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거기에 대응하는 대항 이데올로기 도한 등장하였으며, 이러한 대항 이데올로기에 토대한 교회 활동 역시 폭넓게 전개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인권운동과 정의구현운동, 민족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기타 상당수의 사회개혁운동은 반공주의ㆍ성장주의ㆍ안정주의 등과 같은 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사회운동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대항 이데올로기는 교회의 일부 지도층과 진보그룹에 의해 형성 추진된 것으로서 기본적으로는 이상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한국교회에서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항 이데올로기로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가지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나름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교회지도자들의 사목교서나 사목정책에서 함께 표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교회를 끊임없이 쇄신시키는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민족사에 동참하면서 민족의 통일과 발전에 보다 기여하기 위해서는, 또한 교회의 생명력과 역동성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전통과 지배 이데올로기에로의 안주하려는 자세보다 자신의 구각(舊殼)을 깨뜨리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전제될 때, 광복 50년은 「민족의 희년(禧年)」으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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