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광복50주년을 맞았다. 특히 한국교회는 선교를 비롯 여러분야에서 2천년대 민족복음화를 위한 일대 변신의 기회로 삼아야 되는 중요한 시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가톨릭신문은 평생을 선교와 교육에 투신해온 서강대학교 석좌교수 정의채 신부의 사목생활을 되돌아보고 정의채 신부를 통해 교회의 통일노력과 참된 인간상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정의채 신부의 광복50주년 특별 기고문 형식으로 선교와 통일을 내용으로 2회에 걸쳐 연재한다.
88년 명동 재임시 「시위허가제」처음 실시
먼저 지난해 나의 고희기념식에 참석해 주신 많은 분들께 이 지면을 통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그 기념식은 사제로서는 부족한 면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사목적이고 교회내적 활동면이 부각되기 보다 학자로서 사회적인 면이 드러났던 자리라고 생각된다. 마침 가톨릭신문에서 광복50주년을 기념해 나의 사제로서의 삶에 대해 물어와 이번 기회에 사제생활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려 한다. 이 글에서 나는 사제로서 정의채에 대해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밝혀보고 싶다.
1953년 사제서품후 나는 보좌신부로 임명됐다. 전교에 전력했던 그때 부산 초량본당에서도 그랬고 서대신동본당에서도 그랬지만 많은 영세자를 배출할 수 있었다. 예컨대 1956년 서대신동본당에서는 7백여명이 영세했고 1957년에는 예비자 2천명중 약1천7백명이 영세했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한 본당에서 50명내지 1백명정도 영세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강론때마다 전교의 중요성을 말한 결과 신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사제 정의채의 고백
로마 유학을 마치고 서울대신학교에 부임해서도 신학생교육과 영성지도 외에도 명동에서 지성인교육을 하여 약1천명 내외의 지성인들이 영세입교 했다. 우리문단의 거성인 박경리씨도 딸과 함께 그때 영세했다. 법조계 학계문단 실업인 정치인 군관계인사 등 많은 인사들이 그때 영세하고 그후 교회내외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러나 나의 본직책은 사제양성이었으므로 사제양성에 전력투구했다. 1961년 내가 대신학교에 갔을 때는 남한에 대신학교가 서울뿐이었다. 그때는 제주도에서도 서울신학교로 왔다. 그후 얼마안돼 광주신학교가 생기고 지금은 전국에 6개 대신학교가 생겼다.
이 시기에 가장 보람을 느꼈던 것은 역시 많은 사제서품자들을 낸 것이다. 특히 1990년에 서품자는 서울신학교에서만도 79명에 이르렀다. 아마 세계 어디에서도 한번에 한 신학교가 이렇게 많은 서품자를 낸 곳은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세계교회안에서는 큰 역할을 해야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한국의 대신학교 또한 세계교회에 이바지해야 할 단계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그 때문에 나는 1990년 10월 한달동안 열린 제8차 시노드(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대신학교책임자로서 주제발표를 하게 되었으며 내가 발표한 사제양성내용은 우리시대의 사제양성의 지침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도적권고 「현대의 사제양성」에 1백퍼센트 전부가 수용되었다. 내가 그 시노드에서 발표한 내용은 인성교육의 중요성, 지적교육의 향상 특히 영성교육의 심화, 사목적 토착화의 필요성 등이 골자였다.
교회의 세계화 소명
이밖에도 1981∼84년까지 4년간 실무책임을 맡고 한국교회사상 초유의 「한국천주교 2백주년 기념사목회의」작업은 참으로 보람된 일이었다. 이 사목회의의 내용들은 하느님 백성의 밑뿌리에서부터 올라온 것이었으며, 교구차원, 때로는 본당차원과 각 수도단체 평신도단체들이 적극 참여하여 회의등을 거쳐 12개 의안이 초안으로 작성됐다. 이 초안은 본부와 관련단체간의 수체례에 걸친 보완작업, 그리고 전문가들의 의견과 사회조사를 통해 완성됐다.
이런준비를 거쳐 1984년 5월 6일 교황성하의 참석과 말씀으로 사목회의가 개최됐다. 만4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전국방방곡곡에서 모든의견이 수합되어서 성립된 의안이었다. 현재와 미래 특히 2천년대 교회의 절대요청은 토착화를 위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의안들에는 2천년대에 나타나야할 교회상이 현장의 소리들과 함께있다.
또 은퇴후 시대적 요청에 따라 서강대학에 설립한 생명문화연구소도 큰 보함을 느끼게 한다. 무참히 인명을 상해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우리현실에서 또 인류문화가 자연과 인간생명존중을 기본으로 새지평을 열려고 하는 시점에서 생명문화연구소를 개설하여 녹색(Green)문화와 인간생명존중사상을 고취하는데 일조한 것은 큰 보람이었다.
생명존중 사상 고취
1984년 8월 에서 1988년 2월까지 불광동본당에서의 사목은 나에게 양치는 일에 혼신의 힘과 열성을 다 쏟는 기회가 되었다. 많은 일들 중에서 몇 가지를 말해 본다면 먼저 구역의 활성화였다. 즉 소공동체를 아주 새롭게 또 실정에 맞게 밑뿌리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활성화하고 싶었다. 미사나 대화를 하기전에 가족단위로 한사람 한사람 만났다. 그 결과 주일미사 참여수가 부쩍 늘기시작했고 특히 남자들의 미사참여수가 전체참여자의 반 가까이 됐다. 영세자도 다른 본당에서는 줄어든다고 하지만 꾸준히 늘었다. 나의 부임당시에는 역촌동 구파발본당 등이었지만 3년반후 떠날 때는 1만1천명 가깝게 되었다.
또 한편 「가정의 해」를 설정하여 교황의 가족축복을 받아 혼인갱신식과 가족축복을 받게 했더니 모든 가정에 은총이 넘치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늘까지 나의 마음에 큰 기쁨을 주는 것은 교무금과 주일헌금과는 별도로 바오로회를 조직하여 애덕행위를 실천케했던 것이다. 1986년 한 해에 5천여만원이 모금되어 그때 그 주변의 소년소녀가장을 비롯하여 많은 극빈자들을 도울수 있었다. 이 회는 아직도 건전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듣고 있다.
또한 장년층의 신앙 활성화를 위해 그들을 데리고 초상집에 연도를 이끌어 갔다. 그결과 20∼30명 장년들이 따라 나섰으며 어느사이엔가 연도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가난한 상가에서 연도를 마치고 돌아올때의 마음의 기쁨을 그들이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도 40∼50명의 장년들이 초상집에 연도를 간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은 피정을 좋아하는 편이기에 봄 가을 적어도 연2회 본당 피정을 하고 각단체도 단체대로 활동과 피정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하여 본당은 먼저 구역 소공동체에 활기가 넘치게 되었고 본당전체에 하느님의 생명이 충만하는 것을 느끼게 됐다. 특히 가정은 교회의 가장기본적인 세포이기때문에 기도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도록 힘썼다. 많은 가정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일신되는 것을 보았다. 교회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원천임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가정의 성화 역점
1988년 2월 25일은 내가 명동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눈물이 뒤범벅이되어 앞을 못보며 들어가는 부임은 상상조차못했던 것이다. 그날이 바로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이었는데 수십년동안의 데모중 가장 격렬한 데모였다. 돌과 화염병 경찰의 최류탄은 전장을 방불케했다. 나는 이런 와중에서 더욱어 명동성당을 중심으로하는 데모는 무조건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성역에서의 폭력, 그것은 어느쪽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이있었기 때문에 부임강론에서 평화시위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고 성당역내에서의 수위호가제를 실시했다. 시간과 장소 목적 등을 적어내면 성당행사에 지장이 없는 한, 계단아래쪽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허락했다.
그리고 명동성당을 한국젊은이들의 마음을 순화시키고 올바른 정의를 실현하는 젊은 이들의 문화의 장으로 만들고자 지성인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 젊은이 백서와 시국관련 세미나를 준비했다. 그러나 3월 4월 5월초순까지 조용했던 정국은 5월 15일 조성만군의 시국관련 명동성당구내 투신자살로 큰 파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전국이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한국과 명동성당은 다시한번 빅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그때 상황은 한치앞을 볼수 없는 참담한 것이었다. 투신후 그의 시신을 성당영안실에 정중히 모시고 그쪽 장례위원회측의 요구대로 5일장을 치르게 했다. 그 5일동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등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사건날때부터 장례가 끝날때까지 일분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나는 주임신부로서 윗분들과 숙의한 끝에 일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혼자 책임을 지고 물러날 각오로 일처리에 임했다.
그때 가장 괴로웠던 것은 유망한 한 젊은이의 한 생명이 무참히 희생되어가는 것이었다. 또 몹시 못마땅했던 것은 정치인들이 이런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작태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은자를 위한 사도예절과 추도사를 본당신부가 정중하게 해주어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아마도 이런 사건이 깊이 마음에 잠재해 있었기에 몇년후 서강대학교내에 생명문화연구소를 발족시켜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작업을 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 한가지 고통스러웠던 일은 지방의 모 방위산업체 노동자들이 서울에 있는 대우본사 점령을 시도하다 좌절, 체포되는 바람에 노동위원장을 위시하여 약 2백명의 근로자들이 명동성당으로 피신온 사건이었다. 우선 그들을 밖에서 노숙시키면 안되겠기에 문화관을 개방, 잠자리와 물 식품공급 전화가설 등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인간대우를 해주고 신변보호를 해주며 자신철수를 종용할때였다. 처음에는 극도로 흥분한 노동자들이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갈 태세였으나 인간대우에 차차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급기야는 자진 철수케 했다. 10여일에 걸친 피신 칩거 농성중 성당의 불편도 많았지만 성무나 성당행사에는 일절 지장을 받지 않는 방향으로 지혜와 인내와 용기로 설득한 것이 기억에 새롭다.
조성만군 투신충격
서울대신학교 책임자로서의 일 또한 감회가 깊다. 젊은이들이 학문과 인격, 영성이 깊어지고 사목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후 드디어 사제로 서품되어 사목일선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다. 급변하는 세계와 상황속에서 2천년대의 일꾼으로서 학문적으로 또 영성적으로 철저히 교육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선 앞으로 만나야 할 가장 큰 민족적 문제이며 또 교회의 문제인 북한선교를 위해 북한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했기 때문에 북한학 강좌를 설정하였고 사목자로서 말씀 전달의 기술을 습득케하기 위해 설교학을 강화, KBS TV의 전문가들을 초청 강론 작성법과 시청각적 효과를 얻는 훈련 등과 키운슬링과목 신설, 영성강화팀, 컴퓨터교육 등 많은 일을 계획하고 실천했다.
북한학 강좌도 마련
학교식당에서 교수와 학생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는 일도 시작해 학생과 교수신부의 인간적인 친밀을 도모했다. 신학생이 거의 3백50∼4백명에 달하는 큰 집단이어서 인격적으로 또 영성교육에 큰 문제가 있어 50∼60명 정도로 나누어 살 수 있도록 기숙사도 신축했다.
사제생활은 역시 복음적청빈이 요구되는데 그 실천이 그리 쉽지 않은 우리 현실을 감안, 신학생시기부터 자기 것을 주는데 기쁨을 느끼는 습성을 갖게하려고 토요일 하루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통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병자 무의탁자, 감옥에 있는자, 신체부자유자, 정신박약자, 고아 등을 찾아 봉사하고 자기 것을 주는 습성을 기르는 애덕의 날로 정해 실천하였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차차 학생들이 그 진의를 알게되어 대부분이 열성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또 그런 삶이 보좌신부때도 본당에서 실천되면 많은 젊은이들과 신자들이 참여 할 것이기 때문에 교회쇄신과 2천년대 하느님 나라도래에 큰 영향을 미치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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