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9세 교황(1846~1878)은 원죄로 인한 인간의 부패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초자연적인 도움의 필요성을 명백히 하며 한참 맹위를 떨치고 있는 세속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적인 사회회복을 추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1854년 성모 마리아께서 잉태되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고려하여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없이 잉태하셨다는 전통적인 신앙을 하나의 신조(信條)로 선포하였다. 사실 이러한 신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통적으로 인정되었지만, 하나의 신조로 선포된 방식이 공의회의 결의가 아니라 교황좌(敎皇座)의 선언이었다는 점이 특이하여 신앙교리를 선포하는 교황 교도권의 한계의 열쇠가 되는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이 이후 공의회에서 다룰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가 될 것임이 확실하였다.
그리고 신자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가지고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가톨릭 입장에서 배척해야 할 80항목의 시대적 유설(謬說)과 잘못된 교의(敎義)를 배척하기 위하여 1864년 「실라부스」(Syllabus, 謬說表)를 발표하였다. 그 대상은 범신론(汎神論), 자연주의, 유리주의(唯理主義), 사회주의, 공산주의,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교황령과 교황의 속권,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그리스도교적인 결혼의 본질 등에 관한 그릇된 주장들을 예리하게 지적하여 배척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측 뿐만 아니라 가톨릭 측에서도 교회 문화에 대한 폐쇄성과 진부성을 비난하였다. 실라부스가 아직 교의적 효력을 요구하지는 않았고, 방향을 제시하였을 뿐이지만 이 즈음에 공의회 소집 가능성이 타진되면서 이 실라부스 내용 전체가 교황좌의 선언을 통하여 신조로 선포되지나 않을까 불안해 하였다.
1864년 12월 6일 꾸안따꾸라(Quanta Cura) 회칙이 발표되기 이틀전 예부성성(禮部聖省) 회의에서 추기경이 아닌 자들을 내보내고 공의회소집에 대한 의사타진을 한후에 성성의 모든 위원들에게 문의하였다.
1854년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의, 1864년의 실라부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동일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 이후 교회쇄신을 위해서 열렸다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내에까지 침투하여 신앙에 위협을 가하는 유리주의와 자연주의, 세속주의 등의 오류를 시정하려는데 그 목표가 있었다.
프랑스 군대의 철수로 교황청 보호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리고 교황의 위신에 손상을 가할 수 있는 분위기 등 당시 유럽의 혼란한 시대적 상황에서 공의회 소집시기가 부적당하다는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라이삭(Reisach) 추기경과 만닝(Manning) 몬시뇰 등의 노력으로 이러한 염려가 극복되고 1865년 3월 9일 쥬셉뻬(Giuseppe Biz-zarri) 추기경에 의해 마련된 안에 따라 교황은 추기경으로 구성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와의 전쟁, 로마에 주둔한 프랑스수비군의 철수로 1867년 여름까지 이 위원회가 아무런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베드로 사도 순교 1800주년 축제기간중인 1867년 6월 29일 공의회 소집 사실이 공적으로 발표되었다.
공의회 소집이 공적으로 발표된 이후, 불필요한 토론으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적이 있는 트리엔트 공의회 경우를 피하기 위하여 즉시 필요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초청된 신학자들 가운데 2/3는 로마에 거주한 학자들 가운데서 선발되었는데 독일내 여러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은 초청되지 않았다.
그러나 헤팅거(Hettinger), 헤르겐뢰터(Hergenrother), 헤플레(Hefele), 뻬로네(Perrone) 등 실력있는 신학자들이 준비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교회규정이나 정치, 사회적인 새로운 상황에 접한 정치와 교화와의 문제에 대한 위원회는 빈약하였지만 합리주의의 오류를 교정하고 교의(敎義)를 정의(定義)하는 위원회는 강화되었다.
그 이듬해인 1868년 6월 29일 발표된 「영원하신 성부」(Aererni Patris)라는 칙서로 1869년 12월 8일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확정하였다. 전례(前例)에 따르면 국가의 원수들이 공의회에 초청되었지만,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또 많은 나라에 반성직자주의 사상이 팽배하여 교서에 국가 원수들을 초청하는 문구를 넣지는 않고 정부와의 협력관계 가능성을 간단히 언급하는 문구를 삽입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톨릭과 갈라선 동방교회 주교들에게는 초청장을 보냈지만 동방교회 주교들의 권위를 충분히 예우하지 않는듯한 편지 내용 등 적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거부되었다. 그리고 모든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과 비가톨릭 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공의회 개회 며칠 전인 1869년 11월 말에 공의회 진행규칙이 발표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교부들이 자유스럽게 순서를 정하였는데, 바티칸 1차 공의회에서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피하고 회의를 효과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하여 공의회 준비 위원회 상층부에서 마련하여 교황의 권위로 하달하였다.
그러나 공의회 준비 벽두부터 가톨릭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간의 논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교황의 무류지권(無謬之勸, Infallibilitas)을 반대하는 자들을 설복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사실 참석한 대부분의 교부들은 전통적인 교의에 새로운 혁명적인 내용을 첨가시키려는 뚜렷한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듯 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