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3년 12월 4일 트리엔트공의회로부터 1864년 12월 6일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장장 3백1년이 흘렀다. 두 공의회의 시간적인 간격이 이렇게까지 길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렇게 긴 세월 동안 한번도 공의회가 열리지 않았던 까닭은 역사적인 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절대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루이 14세 왕이나 요셉 2세 황제치하에서 공의회가 열렸더라면 주교들은 자기 교구의 목자로서보다는 군주들이 파견한 대표자로서 처신하였을 것이고 공의회는 아무런 자유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되었을 것이고 몇몇 국가들끼리 연합하여 여러 동맹국가들로 갈라져 있던 유럽의 정치적 상황에 휘말려 가톨릭 교회도 역시 분열되는 위험에 휘말렸을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국이나 영국, 아일랜드, 벨기에 등의 국가에서도 주교들의 자율권이 보장되어 공의회의 소집에 한층 유리하게 여건이 조성되었다.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1869년 12월 8일 공의회가 열렸는데, 트리엔트 공의회처럼 모든 추기경들과 주교들, 수도회총장들이 공의회의 정식 참석자로 소집되어 투표권을 가지고 출석하였다. 약 1천2백여명이 참석하였는데 이 가운데 7백여명이 주교들이었다.
많은 주교들의 무관심주의로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는데 진지하지 못한 점도 있었지만, 4월 24일 반포된「하느님의 아들(Dei Filius)」헌장에는 세상을 자유롭게 창조하시고 하느님의 섭리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재천명하였다. 하느님의 존재는 이성의 힘으로 알 수 있고 증명되지만 동시에 계시의 필요성도 천명하였다. 초자연적 선물인 신앙의 본질과 인간의 의지에서 출발한 지성의 자유로운 동의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를 설명함으로써 신앙과 이성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재확인하였다.
이 헌장은 물질주의적인 무신론 뿐만 아니라 관념주의자들의 범신론을 비롯하여 현대의 사상적인 여러 오류들을 예리하게 지적하여 고발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성의 본질과 역할을 지나치게 찬양하거나 비하하는 교리도 단죄하였다.즉 초자연적인 계시를 근본적으로 배제하면서 이성의 능력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 유리주의(唯理主義)를 거부하고 동시에 이성의 역할을 수동적으로만 보고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을 거부하는 학설도 배척하였다.
종합적으로 보아 이 헌장은 어느 한편에 기울어지지 않고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모두를 있는 그대로 균형 있게 평가하였다. 1800년대에, 교회가 인간의 역량을 평가절하였다는 비판이 부질없음이 확이되었고, 교회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능력에 신뢰심을 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다.
공의회 개회 시작부터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문제가 공의회의 모든 참석자들에게 큰 관심거리였고, 본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뜨거운 감자처럼 다루기 힘든 주제였다. 회의 벽두부터 주교들은 다수의 교황무류지권 지지파와 소수의 반대자들로 갈라졌다.지지자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아메리카, 아일랜드, 선교지역 출신 주교, 프랑스의 일부 주교, 스위스, 벨기에 출신들이었고 반대자들은 주로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의 일부 주교들이었다.
관례대로 교황청 인사들은 이 첨예한 문제를 먼저 다루지 않고 다른 참석자들에 의해서 제기될 때까지 기다렸다. 12월 말경 이 문제를 공의회 의제로 채택하는 서명이 참석자들의 다수에 의해 시작되어 1개월후에 4백50여명의 주교들이 의제채택에 동의하였고 1백50여명의 주교들은 반대하였다.
2월 초에 공의회 참석자들의 다수가 교황의 무류지권을 지지하는 토론에 호의적이었다. 교황은 이즈음 몇 주간 동안 공의회 참석자들은 공의회 진행 당국으로 부터 몇가지 내용의 칙령들을 받았지만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강조가 없었다.조금 기다린 후、 3월초에 공의회에서 이 문제를 정식의 제로 다룰 것을 발표하였다.그리고 이 발표와 더불어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신속하게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870년 5월 9일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심의가 시작되어 37회의 회합을 통하여 1백40회에 걸친 격렬한 찬반 연설이 있었다. 1870년 7월 13일 중간 표결에서 4백51명의 교부들이 교황 무류성교리에 찬성하였으나 88명이 반대、 66명이 조건부로 찬성하였다. 참석자 대부분이 그 교리에 찬성하였으나 반대자들의 대부분도 교리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신조로 발표하는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것 뿐이었다.
제4차 회의에서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의 교리가 포함된 교황령 「영원하신 목자(Pastor aeternus)」가 찬성 5백33표、 반대 2표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공의회 수위설과 교황권을 제한하려는 여론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 그리고 주교들과의 관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문제는 당시 교회내의 여러 분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갈리아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도 얘기되고 있다. 유럽 전체의 혼란스러운 정치적인 상황으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권위와 주교들의 권위와의 관계를 검토하려는 작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어 결국 이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교황의 수위권이 교리적으로 더욱 강화되고 세속권력의 정치적 영향으로 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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