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마태5,6)
「옳은 일」또는 「정의」는 하느님 나라의 특징이며 특별한 표지이다. 성서안에서 정의와 「의인」 즉 진복선언에 나오는 정의와 「의인」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실현될 때 실제로 이룩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또는 메시아가 가져 올 구원질서에 대하여 가난한 자와 슬퍼하는 자가 가지는 굶주림, 갈망을 말하고 있다(이사야9, 4 예레미아 23, 5이하ㆍ33, 15이하 참조 마태오 12, 20 참조). 『그리고 목말라 하는자』는 이같은 구원의 갈망을 암시하고 있으며 미래의 구원시대를 암시하는 광야에서의 체험(시편107, 4~9)과 만나와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을 또한 상기시키고 있다(이사야 48,21 시편 78,24이하:105, 40이하). 굶주림과 목마름이 채워짐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사야 49,10이하:65, 13) 이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이미 구약안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아모스 8, 11)과 지혜에 대한 갈망(잠언 9, 5 집회서 24, 21:51, 24)으로 옮겨 갔다. 마태오가 자주 애용한 「정의」는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된 구원과 함께 이에 요청되는 인간의 자세를(마태오 3,15:5,20:6, 1.33)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선물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자』에게 주님은 그들이 장차 배부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정의는 인간관계들 속에서 나타나는 정의나 판결, 또는 흔히 일상사안에서 말하는 옳고 그름이나 사회적 정의보다 훨씬 깊고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의는 하느님 앞에서 가지는 인간의 올바른 자세 태도 행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운자」로 인정받으려는 자는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지키는 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운자」로 인정받게 되고 마침내는 하느님의 구원이 그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정의는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에 인간은 단지 겸손과 감사로 이 은총을 받아들일 뿐이다.
마태오 역시 정의를 하느님의 선물로 강조하고 있는 한편 인간이 하느님앞에서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가져야 할 행위, 자세임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마음의 회개」절실
제자가 지녀야 할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명백히 드러난 하느님나라의 정의와 그 나라의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충실하는 데 있다. 하느님나라의 정의와 성덕은 모두 은총이며 필요 조건으로써 개인의 변화인 마음의 회개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유의 완성으로 끝난다.
주님은 굶주리는 자에게 배부르게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그것은 순간적인 만족이 아니라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지속적인 그리고 완전한 만족이요 배부름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금이 아니라 하느님나라가 도래할 때 비로소 실현될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행위이다. 굶주리는 자들은 「가난한 자」「겸손한자」들처럼 그들의 삶을 하느님의 손안에 큰 신뢰로 내맡기고 곤경속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도움을 기대하는 자들이다. 육체적인 굶주림은 인간이 겪는 굶주림의 오직 일면일 뿐이다. 그러나 빵을 향한 외침은 전 인간의 외침이다. 비록 육체가 만족했다 할지라도 또 다른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다. 이 굶주림과 목마름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안에 심어 주신, 즉 하느님이 원하신 정신적인, 영적인 굶주림이요 마음의 굶주림이다. 이는 육체적인 굶주림 보다 훨씬 더 깊고 고통스런 것일 수 있다.
배고픔과 목마름
인간의 삶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의 삶이 또한 하느님앞에서 합당한 삶이 되기 위해서 진정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갈망」을 지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이 갈망하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최종적으로 충족되고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만족은 여기에서가 아니라 미래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여 인간이 현실에서 도피하려 하거나 인간의 활동을 마비 또는 저하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 내적으로 가난하거나 마음의 자유를 얻은 사람은 이 세상것에 대한 한없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미 떠난 자이다. 대신 그 자리에 그사람안에서 하느님나라를 향한 다른 종류의, 그리고 더 깊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자라게 된다. 이 배고픔과 목마름은 세상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 지고 하느님나라의 보화에 열리면 열릴수록 더욱 더 강렬해 진다.
육체적인 차원에서 누가 음식과 음료를 전혀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그가 중한 병에 걸렸다는 표시이다. 더욱이 그 사람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전혀 없다면, 혹은 하느님나라의 보화에 대한 갈망조차 찾아 볼 수 없다면 그것 역시 그가 내적으로 중한 병에 걸려 있다는 표시이다. 이와 반대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음식과 음료에 대해 막을 수 없는, 무조건 만족시켜야만 하는 근원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은 내적 가난을 통해서 그의 마음속 깊이 육체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훨씬 능가하는, 즉 하느님나라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근원적으로 그리고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느낀다.
하느님 나라는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는 정의(의로움)을 통해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다. 그는 그의 삶안에서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신다. 그는 하느님의 관심사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관심사 아래 자신의 관심사를 둔다.
「풍요」의 공허함
「주의기도-간청」안에서 보듯이 의인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배고파 하고 목말라 한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인간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배고파하고 목말라 한다.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자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드리고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준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자기 안에 지니면 지닐수록 하느님은 그에게 이미 이 세상안에서 당신을 주실 것이고 내세에서도 하느님의 풍요를 주시어 그를 더욱더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이다. 가난과 하느님나라를 위한 개방성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정의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끊임없이 깊게 하고 모든 것에 올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길을 준비하는 사람은 약속된 만족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상의 풍요의 공허함을 알고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을 「비우는 자」에게는 「풍요하게 채워진다」는 것을 아는 자는 행복한 자이다. 이를 깨달은 자는 하느님 외에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그들은 더 이상 배고프지 않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묵시록7,16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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