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예술과 일반 예술 사이의 차이는 표현양식이나 기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예를 들면 까따꼼바 벽화는 표현방식이나 기법이 유지하기 그지 없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그 내용에 초점을 맞추었고 일반 예술은 표현의 아름다움 자체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예술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의 육화신비처럼 초라한 표현을 통해 위대한「계시」를 드러낸다. 표현을 육체에,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영혼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지난 세기 종교예술은 아주 빈약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석고상(石膏像), 지나치게 감상적인 모상, 무미건조한 색깔, 보잘 것 없이 반짝 반짝 빛나는 금속조각 등으로 치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대중예술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제조업자들의 주문에 의한 조잡한 상품에 불과할 정도였다.
엥그르나 들라크르와 같은 저명한 예술가들이 그리스도교적인 주제를 다루었지만 사실 종교적인 작품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정도였다. 1872년의「성 요한회」와 1921년「베아또 안젤리꼬(Beato Angelico)학교」가 설립된 이후에야 그리스도교적인 그림에 대한 이론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음악 분야에도 위와 대동소이하여 교회에서는 세속적인 가락과 아름다운 노래가 유행하였지만, 이로 인해 신심이 깊었던 구노의「아베마리아」와 같은 멋진 연주곡들로 평가받는 곡들도 탄생하였다. 다행히도 브뤼크너, 베를리오즈, 리스츠, 멘델손, 프랑크, 뻬로시 같은 작곡가들이 정통적인 성가곡들을 작곡하였다.
이즈음에 여러 곳에서 성당의 오르간 반주자들과 지휘자들을 양성하는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특별히 1870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승인되고 열성적으로 장려된「싼따 체칠리아 협회」의 활동으로 성(聖) 음악과 그레고리안 음악이 빛을 보게 되었다.
예술적인 변화는 건축에도 아주 심했다. 1841년 이탈리아의 노바라에 알레산드로 안또넬리가 설계한 가우덴지오 성인 성당의 둥근 지붕(Cupola)과 같은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독창적인 작품들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장 유식한체 하면서 그러한 자신들의 태도를 합리화하였지만 대개는 과거의 작품들을 모방하거나 표절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새로운」(Neo-)이라는 거창한 접두사가 붙여진 새 비잔틴식, 새 로마식, 새 고딕식이라는 성당들이 등장하였다. 옛 건축양식과 혼합하거나 배합하는 것도 시도하였으니, 예를 들면 프랑스의 릴(Lille)주교좌 성당은 랭스의 현관, 아미앙의 본관형(型), 보배의 내진형(內陳型), 샤르트르의 종각 등을 훌륭하게 배합하였다. 그리고 이즈음에 철재를 교회건축에 사용한 것도 새로운 시도에 해당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스페인의 마르셀로나에 있는 성(聖)가정 대성당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1920~26) 성당으로 옛 고딕 형태를 변형하였는데 아직도 공사를 계속하고 있으며, 파리 근처 랭시의 노트르담성당은 오귀스트 뻬레의 설계(1922~23)로 건축되었는데 기적적인 예술품들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꼬르뷔지에가 프랑스의 롱샹에 설계한(1950~53) 노트르담성당, 앙리 마띠스가 방스에 설계한(1951) 로사리오(Rosa-rio)성당, 지오반니 미켈루치가 이탈리아의 피렌체 근처 고속도로 인근에 지은(1961~64) 세례자 요한 성당들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쟈꼬모 만주가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에 제작한「죽음의 문(Porta della morte)」(1965)은 이후 특히 조형미술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같은 해에 바오로 6세 교황은 씨스틴 성당에 예술가들을 모이게 하였고 1973년에는 바티칸 박물관에서 2백5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기증한 그림, 조각, 판화 등 8백여점이 소장된 현대종교미술관을 개관하였다. 많은 선구자들의 주도적인 노력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지침은 그리스도교 예술의 봄을 기약하였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 예술의 봄은 아직도 멀었는가? 하느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인간의 혼을「우리 귀에 익은 아름다운 소리」로 더 많이 들을 수는 없을까?
하느님의 잔잔한 미소와 따스함을 느끼게 하는 성화와 성상은? 교회건축의 본질적요소의 하나는 초기 교회건축에서 처럼 하느님의 현존을 내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배려하는 살아있는 빛과 공간의 적절한 조화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은 고개를 숙일줄 알며 무릎을 꿇는 자세일텐데, 어찌된 일인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성당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으니 참으로 우려할만한 현상이다.
우리 교회 건축의 현주소는 극장식인가, 창고식인가, 새마을회관식인가, 아니면 직수입 형인가? 그리스도교 예술은 차가운 마네킹에 걸쳐진 기성복의 편리성에 있지 않고 소리로, 색깔로, 형상으로, 공간으로 하느님을 체험케 하는 일상의 살아있는 신학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