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원수 되어 있는 유다인과 이방인을 화해시켜 하나의 새 민족을 만드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에페2,15~16).
그리스도는 이처럼 온 세계 모든 이가 인종, 피부색, 민족, 계급 등 모든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 되고 서로 형제 자매 되어 사랑함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의 일치 속에 하나될 수 있도록 당신을 온전히 희생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대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12,32). 교회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사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가슴이 찔려 파와 물이 흘러내릴 때 거기서 나왔습니다(교회헌장 4 참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도처에 만연되어 있는 이기주의, 물질주의, 퇴폐풍조와 아울러 극단적 종교적 원리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찢어진 세계에는 어느 때보다도 상처의 치유와 모든 분쟁과 다툼의 종식과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수난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분의 몸인 교회가 이 시대에 용서와 화해를 위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교회는 사실 언제나 인류세계를 구하기 위한 십자가의 소명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우리 조국의 현실을 볼 때에 더욱 그렇습니다. 올해는 이른바 광복 50주년입니다. 광복의 기쁨,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그 기쁨을 다시 새기게 되는 뜻깊은 해 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큰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올해는 또한 이 땅과 이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광복 50년의 기쁨보다 분단 50년의 슬픔과 아픔이 더 큽니다. 우리는 같은 핏줄, 같은 민족인데 왜 이렇게도 서로 미움과 불신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까? 상식적으로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비극이요 슬픔입니다. 그러기에 광복 50주년을 참으로 뜻깊게 기리기 위해서 우리는 올해 어떤 일이 있어도 분단의 벽을 허무는 일에 착수하여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동족으로서 서로 미워하지 말고 비방하지말며 서로 만나서 함께 평화 통일의 길을 모색하는데 뜻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회, 종교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그 길을 모색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도 교회대로 평화 통일의 길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이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수난 하신 주님의 그 수난을 깊이 본받고 사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 되어 있는 유다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키고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기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상에 제물로 바치셨듯이 올해 우리 믿는 이들은 이 땅에서 같은 핏줄이요 동족이면서 원수 되어 있는 남과 북이 화해하고 하나 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 이기주의를 버리고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 동포들은 연변을 통하여 우리 남쪽사정을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변을 통해서 북한 동포들이 아는 남쪽사람들은 경제적으로는 잘 살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나 물질주의ㆍ이기주의에 빠져있고 과소비와 사치로 사람들이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더러 인정이 메마르고 없는 이들, 약한 이들을 업신여기며 심지어 연변에서온 동포들을 불법체류 등의 약점을 악용해 착취하고 학대하는 등 비인간적인 짓을 예사로 하고있다는 것입니다.
남한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인 인식밖에 가질 수 없는 북한 동포들이 물질주의ㆍ이기주의로 타락한 남쪽과 평화통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제국주의」와「자본주의」에 물든 남한을 공산혁명으로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남북간에 왜 이렇게까지 대화의 길이 막혀 있는지, 왜 북의 체제가 극단적 폐쇄주의와 이로 말미암은 심각한 경제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지를 단편적으로나마 설명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때 우리가 현재와 같이 돈만 알고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한 우리가 바라는 평화통일은 결코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통일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시기에 촉구하신 대로「회개」해야합니다. 그리하여 물질보다는 인간을 존중할 줄 알고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 약한 이, 연변 동포들, 또는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진실로 인간다운 인간이 될때 이 소식이 또한 자연히 연변이나 기타 경로를 통해서 이북에 그대로 전달될 것입니다.
『남쪽의 우리 동포들은 잘 살뿐아니라 그렇게 후덕하고 동포애도 많고 없는 이들과 공통을 나눌줄 안단다』『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동포들에게 왜 총을 겨누고 있어야 하는가?』『빨리 통일되어 이런 동포들과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그것이 우리의 살길이 아닌가?』북한 동포들의 생각이 이렇게 변화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통일의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통일의 길은 결코 먼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안에 우리곁에 그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바로 옆에 있는 가난한 형제, 고통받는 형제, 굶주리고 헐벗은 형제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줄 알때 거기 통일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가 마음 상한 이웃과 서로 화해하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손잡을 때 거기 통일의 길이 있습니다. 사실 남쪽에 사는 우리 모두가 진정 인간으로서 남을 존중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나눌 줄 안다면 그것이 곧 통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통일의 힘입니다. 그럴 때에는 통일비용이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같은 인간존중과 이웃사랑이 또한 세계화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정신적 바탕이 없는 세계화는 일등만이 살아남는 치열한 경쟁속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무서운 현상을 나타낼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b).
주님은 죄많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시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마태 8,17). 그분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아낌없이 주시고 또 주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이처럼 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995년 2월 24일
서울대교구 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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