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인간이 인간이게끔 하는 모든 도덕적인 가치들을 깡그리 외면하게 한다. 전쟁터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후의 가치는「살아남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되는 것으로 여겨져 이「생존」이 모든 가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약1천만명의 사망자와 2천만명의 부상자를 낸 인류 역사상 그 유래가 없이 참혹한 이 전쟁이 외형적으로는 한 왕가의 살해사건으로 일어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함스부르그 왕가의 계승자인 프란체스코 페르디난도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살해되었는데 살해자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르비아 출신이었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선전포고를 하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동맹을 맺자 러시아와 프랑스도 동맹을 맺어 전쟁이 발발하였다. 사실은 바다를 제패하고 세계무역을 주도하려는 영국과 독일의 오랜 갈등, 발칸지방에 세력을 팽창하려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누적되어온 갈등이 세계대전을 이미 예고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전쟁이 전반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1917년 8월 1일에는 교황이 교전국(交戰國) 열강에게 법이라는 도덕적인 힘으로 무력사용을 중지하고 무기감축의 조정권을 가진 국제적인 중재기구를 구성하자는 평화적인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현시점에서 전쟁 배상금을 논한다는 것은 무장 해제와 전쟁종식에 수반하는 많은 가치에 비교하면 무의미하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자국의 실리를 고려한 국제정치적인 밀약때문에 그의 중재안이 외면당했다. 즉 이탈리아아는 전쟁에 개입하기 전 1915년 4월 26일 런던에서 비밀협약을 맺어 차후 전쟁문제와 평화협약의 국제활동에서 교황청을 제외시키는 조건을 동맹국들로부터 보장받았다. 이는 국제문제 해결의 중재자로서 교황의 위치가 부상(浮上)하면 교황청과 갈등관계에 있는 이탈리아에도 실익이 없고 국제문제에 교황의 권위가 인정받는 것이 프랑스와 영국에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했던 것으로 본다.
전 세계가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서로가 교황이 자기 나라를 지지해주도록 적극적으로 요청하여 교황은 처신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특히 프랑스는 모든 방법을 다써서 교황이 독일을 전범으로 단죄하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지만 베네딕도 15세 교황(1914~1922)은 공평한 입장을 견지하며 적대 민족들간의 증오를 진정시키고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교황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쟁 당사국들을 평화담판에 끌어들이는데 수반하는 어려움을 과소평가하였던 것 같다. 교황의 호소를 외면한 갈등은 어느 한편의 완전한 패배만을 기대하고 무력에 의한 승리만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추구하였다.
교황청은 교황의 중재안이 거부되고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완화시키려 모든 힘을 기울였다. 바티칸은「제2의 적십자」로서 부상한 포로들과 행방불명자들에 대한 정보를 당사자 가족들과 해당국에 알려주는 사무소를 개설하고 이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리고 피점령 지역민들의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을 덜고자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군인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기 위하여 군종신부단을 돌보기 위하여 군주의적인 활동을 추진하였다.
이 전쟁은 경제적 열세로, 빈곤과 기아로 전의를 상실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군들이 러시아, 프랑스 등 그 상대동맹국들의 수적 물량적 우세에 밀려 항복하게 되었다. 특히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까울 정도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결정으로 미국이 개입하면서 독일 동맹군들이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고 항복하게 되었다.
소위「평화」의 결과는 다른 방식에 의한 전쟁의 연속에 불과하였다. 프랑스는 1930년까지 독일을 점령하여 승전국으로서의 특권을 행사하였다. 프랑스의 힘을 군사력으로 과시하여 나폴레옹식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야심이 있지 않을까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어느 한편의 악을 징계하기 위하여 또 다른 악을 자행하는 것이 과연 정의롭고 또 평화를 이루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교황의 국제분쟁 중재기구 구성 제안은 국제연맹이라는 기구를 구성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전후(戰後)배상금에 관한 교황의 제의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독일에 과중한 배상금을 부과함으로써 독일경제는 회생불가능한 상태로 떨어지며 드디어 화폐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의 봉기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차후「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야기시켜 유럽세계가 다시 한번 전쟁의 도가니에 휘말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이 끝난 후 교황은 식량과 의류 및 의약품을 거두어보내는 구호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특히 패전국인 독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유럽세계가 승자와 패자로 더이상 분열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화해를 촉진하였다. 비록 이념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의 공동체 정신에서 멀어지고 탈그리스도교화하는 왕들의 절대주의적인 왕권강화, 국수주의적인 국가관, 집단이기주의적인 민족주의의 폐쇄성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영적인 힘과 도덕성 위에 유지되었던 유럽세계의 일치가 무너진 결과가 참혹한 전쟁으로 드러났다. 특히 유럽세계가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 국민들과의 적대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도덕적 가치가 퇴폐한 것도 전쟁의 큰 손실로 볼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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