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1919년 5월 체결된 베르사이유조약으로 독일은 연합군측에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를 보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물자 및 장비를 인계하고 영토의 일부를 양여하여 독일 제국은 본토면적의 13%, 인구의 10%를 잃게 되었다. 예를 들면 발트해(海)로 나가는 소위「폴란드 통로」를 폴란드에 내놓음으로써 동(東)프로이센과 독일의 나머지 부분이 분리되어 버렸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주민의 대부분이 독일인이었던 단지그(Dan-zig)를 독일에 할양하고 「폴란드 통로」를 독일군이 점령하도록 허용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치정부가 풀란드를 침공할 경우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를 지원할 것임을 경고하였다.
1939년 8월 23일 러시아-독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개입을 미리 방지하고 히틀러가 1차세계대전이 끝난지 21년만인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와 영국이 즉시 전쟁에 개입하였다.
1940년 6월 21일 프랑스 군대가 항복하고 이탈리아의 뭇솔리니가 독일군에 가담하면서 6월 10일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독일군은 대영제국의 저항을 분쇄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 4월 나치군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하고 핀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의 지원을 받아 6월 러시아를 침공하였다. 1941년 12월에 독일과 이탈리아와 연합한 일본이 아시아에서 미국을 대항하기 위하여 전쟁에 개입하여 태평양 소재의 미국과 영국 기지의 섬들을 점령하고 필리핀, 싱가폴, 말레이시아, 버마, 인도차이나 등을 정복하였다.
1942년 러시아와 에집트를 공격한 독일군이 실패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1943년 7월부터 9월까지 미국 연합군측이 아프리카 북부와 시칠리아,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고 1944년 6월 프랑스에 상륙, 1944년과 1945년 러시아의 공격이 개시되면서 주요 산업도시를 폭탄공격하여 파괴하자 독일 동맹군들은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는 이미 1943년 9월 8일 휴전협정에 서명하였다. 독일은 결국 1945년 5월 8일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극동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8월까지 전쟁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중 교회측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1939년 4월 28일 폴란드와 영국과의 협약을 파기한다는 독일의 선언이 있자, 교황청은 새로운 세계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열강들을 설득시키는 많은 외교적인 접촉을 시작하였지만 비오 12세 교황(1939~1958)의 중재노력은 독일과 폴란드측으로부터 외면당했다. 1939년 8월 24일 교황이 라디오로 『정의의 길을 만드는 것은 무기의 힘이 아니라 이성의 힘이다. 정의에 기초하지 않은 제국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평화로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며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좋은 마음으로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는 성실하고 열의 있는 교섭을 하도록』강력하게 요청하였지만 모든 중재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전쟁이 일어나자, 교황청은 즉시 전쟁포로에 대한 소식을 알려주는 사무실을 개설하고 해당국가들에게 그 명단을 넘겨주도록 요청하였지만 독일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였다.
비오 12세 교황은 1939년 10월 20일 발표한「숨이 뽄띠 피까뚜스」회칙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도처에서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사라의 법을 포기하고 종교와 도덕을 철저히 외면하는 시대상황이 세계적인 갈등을 초래한 도덕적인 원인이라고 진단하였다. 전쟁의 참화를 멈추게 할 수 없자 교황청은 우선 전쟁으로 인해 국민들이 당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고통을 완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42년 6월 2일 교황은 한 연설에서 무력분쟁을 연장하고 무력을 강화하며 무기개발을 진행한다는 것은 그자체로 교회의 초자연적인 사명과 평화를 위한 중재 노력을 외면하는 것이 라고 한탄하였다.
날이 갈수록 가톨릭 교회에 대한 독일 히틀러 당국의 적의가 증가하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였다. 1939년 12월 23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평화와 고통받고 있는 자들에 대한 우리 공동의 노력을 지속하자」는 서한이 교황청 주재 미국 대통령의 대표자를 통해 비오 12세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의 휴전협정으로 독일군들이 로마를 점령하였지만 바티칸 시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변경되지는 않았다. 독일인들은 후에 연합국들이 존중하였던 것처럼 그 지위를 존중하였다. 정치적 망명자들은 바티칸 시국에서 안전하게 도피처를 참을 수 있었다. 교황청 원조위원회를 통한 성청의 애덕활동은 전쟁으로 인한 모든 희생자들에게 아무런 구별없이 실행되었다.
이 전쟁이 남긴 것은 인류사회의 극심한 혼란을 남겨놓은 영적이고 물질적인 파괴로 인한 막대한 폐허뿐이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사회경제적인 복구에만 집중하는 추세였고 대중의 집단주의에서 「자기」가 상실되었다. 승리만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적 양심을 가진 자들은 선택의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부당한 점령자들의 명령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유대민족 말살정책과 같은 부당한 처사에 그리스도인은 전쟁중인 국가정책이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처신해도 되는가? 자기 나라의 부당한 침략전쟁의 징집에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할 입장은 무엇인가? 전쟁윤리의 그리스도교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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