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브로커라고도 하는데 부동산이나 어떤 상품매매에 있어서 중간에 소개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재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화해자, 조정자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중개인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을 말합니다. 중개인이 어떤 보수를 목적으로 중간에서 그 일을 한다면 중재자는 아무런 보수 없이 오히려 얻어 맞는 손해를 부여안고 중간에서 화해의 일을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중재자를 중보자라고 합니다. 좋은 말입니다. 여기서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원히 구제불능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느님의 자비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없는 하느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느님의 노여움을 푸셨습니다. 인류의 유일한 중재자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주님과 비슷한 중재자를 봅니다. SOS마을에 가 보면 부모가 버린 아이들, 사회가 외면한 아이들을 친 자식처럼 맡아 키우는 엄마들이 있습니다. 시집도 안간 분들이 아빠(?)도 없는 엄마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회가 지었는데 그 죄를 중간에서 부여안고 있습니다. 일종의 중재자들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린 아기가 혼자 방에서 놀다가 괜히 넘어져서 울었습니다. 빨래를 하던 어머니가 아무리 말로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때 엄마는 회초리를 들고 와서 문지방을 때리면서 야단을 칩니다. 『이놈아, 왜 우리 애기를 넘어 뜨렸니?』하고 마구 때립니다. 이때 아이가 그것을 보고 울음을 그칩니다. 이때 죄없이 애매하게 얻어 맞는 문지방이 이를테면 중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자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했으며 또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하느님께 빌고 간청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고급 교육을 받았고 장래가 보장될 수 있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의 나라 왕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자신의 동족을 위하여 몸 바치고 고생하는 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노예였습니다. 미래를 향해서 일어설 힘도 없었지만 어떤 민족의식이나 꿈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눈을 올바르게 뜬 자가 모세였으며 그는 자기 동족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섭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시작도 하기전에 기가 꺽이고 시나이 반도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 드디어 피눈물 나는 중재자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구원에는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2독서(1고린10, 1~6, 10~12)의 말씀대로 우리는 결코 자기 발로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했듯이 또한 착한 중재인의 이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포도원지기가 아름다운 중재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3년동안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위해 그는 주인에게 1년만 더 참아 달라고 애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3년동안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일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3년이 아니라 벌써 수십년 동안「올해는 열매를 맺겠지」하고 기대하셨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실망시켜 드린 무화과 나무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가 벌 받지 않고 뿌리채 뽑히지 않은 것은 어떤 포도원지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를 위한 어떤 중재자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많이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존과 사건을 비롯해서 각종 범죄들이 선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남부 지방의 가뭄도 누군가의 기도와 희생을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믿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와 보속을 목마르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말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파티에 발현하셨던 성모님께서는 당시의 세 어린이에게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즉 믿는 이들의 중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죄없는 자들의 기도와 희생과 보속 자체가 이 시대의 아름다운 중재자입니다.
사순절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시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재자가 되어 주셨듯이 우리 자신도 아름다운 중재인으로 소명 받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중재자의 길은 힘들고 외롭습니다. 끝이 없는 머나먼 길입니다. 그러나 착한 포도원 지기가 되는 것은 은혜로운 길입니다. 따라서 용기 있게 걸어 갑시다. 그것이 또 참 회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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