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해 10월 15일부터 11월 7일까지 동남아시아 3개국 즉 방글라데시 네팔 파키스탄을 방문했었다.
이번 동남아 방문은 늘상 우리 외국인노동자상당소를 찾는 이 지역 친구들을 좀더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외국인 친구들의 삶은 어떤지, 왜 이들이 한국에 왔어야만 했는지 등등을 알고자 하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은 회교도들이 대다수 이고 힌두교도와 기타 종교인들이 소수로 구성된 국가며 힌두교가 국교인 네팔은 2~3년 전만해도 종교의 자유가 없던 나라이다. 그래서 나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회를 깊숙히 체험하고 싶어서 그곳 가톨릭 신자들과는 전혀 연결을 갖지 않고 방문했다.
호기심ㆍ두려움 가득
처음 5일간은 방글라데시에서 머물렀는데 주로 「다카」와 「보그라」지역의 친구들과 가족을 방문했다. 다카에 도착하니 바키와 시라쥴이 나를 맞아 주었다. 시내에 있는 바키의 셋집에서 지냈는데 바키는 동생과 함께 방 두개짜리 집을 세얻어 지내고 있었다. 방 하나를 차지한 나는 총각들이 지어주는 밥을 먹고 편안한 하룻밤을 지냈다. 바키는 귀국 후 무역 오파상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업을 하기 위해 추진중이었는데 내가 도착하니 자신의 일을 전폐하고 나를 안내해 주었다.
이튿날에는 다카시내에서 생활하는 몇몇의 귀국한 친구들을 연락하여 만났다.
그리고는 아직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핀투라는 친구의 집을 방문했는데 알고보니 핀투는 한국에 나온지 3년이 되도록 부모님과 연락 두절로 지내고 있었다.
돈보다 반가운 사진
나는 핀투가 보낸 3천불과 핀투의 최근 사진을 그의 부모님께 전했다.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기다린 것은 돈봉투가 아니라 아들의 소식이라고 말씀하셔서 나도 콧등이 찡하였다. 핀투는 그 집안이 맏아들이다. 몇년사이에 삐쩍마르고 대머리가 되기 시작한 최근의 아들 사진을 보며 그의 아버지는 『내아들이 왜 이렇게 되었나? 내아들 저렇게 잘났는데』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도착한 다음날은 주일이었는데 바키는 성당을 찾아서 나를 안내해주는 친절을 잊지 않았다. 저녁에 하비브를 만났는데 하비브와 바키는 친구로서 한국에 있을 때 같은 공장에서 산재를 당한 친구들이다. 바키는 엄지손가락 한마디를 절단당했고 하비브는 91년 7월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4개의 손가락을 전부 절단당하고도 2년반동안이나 일을 계속하였다. 하비브는 94년 5월부터 우여곡절끝에 노동부로부터 소정의 산재보상금 9백10만원을 받아가지고 출국했다. 그 금액은 한국인 노동자와 비교해본다면 삼분지 일도 되지 않는 적은 액수로 그가 본국에서 자립해서 살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 금액인 것이다.
삼일째되던날 나는 바키, 하비브 그리고 시라쥴과 함께 다카에서 2백50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보그라」지역으로 향했다.
갑부집 아들도 한국행
보그라에서는 리폰의 집과 시라쥴, 사이풀 그리고 그 지역 최고 갑부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의 두 아들도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2년반전에 한국에 갔는데 한국으로 가기전에는 갑부집의 망나니로서 돈을 낭비하고 말썽만 부려서 세상경험을 하고 오라고 내보냈는데 한국에서 그들은 스스로 돈을 버는 것이 무엇인지, 열심히 일을 하는 보람이 무엇인지를 배우며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카에서는 또다른 인성적인 3명의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한국에서 2년 반 일을 하고 돌아온 후 합작하여 실공장을 시작하였다. 금색, 은색 원사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방글라데시산 레이온을 섞어 생산하는 이 실은 동남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입는 사리에 수놓거나 무늬를 짜넣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시장성이 높고 전망이 있다고 하였다.
또 한국서 일하고 싶어
나를 만난 그들의 말을 옮기자면 『누나 저희들은 한국에서 모은 자본과 배운 기술로 공장을 만들었어요. 우리중 2명은 실공장에서 일했고, 1명은 봉제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기계를 설계하여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제작하고 한국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합니다』『누나 한국에서 먹던 부대찌개와 김치가 생각납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김치 좀 보내주세요』였다.
그외에도 여럿을 만났는데 한 친구는 말하기를 『저는 먹고사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람을 가지고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세요? 그래서 저는 한국에 다시 가서 열심히 일을 하고 싶습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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