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은 신학의 한 독립된 분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 원리 생활규범과 윤리적 가치들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는 곳에 윤리신학은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학문이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되고 발전하였듯이 윤리신학도 그 나름대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시대의 흐름속에서 변화와 발전을 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윤리신학은 어제와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내일의 윤리신학과제를 조명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윤리신학의 발전사
윤리신학의 변화와 발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중심으로 하는 흐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중단없는 변화와 발전을 거듭한다고 하겠다. 마치 한 인간의 성격과 자질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지만 생애의 여러 단계에서 외적 요인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성장 성숙하듯이 윤리신학도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고 토착화하고 발전하는 과정 안에서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어느 신학자의 말대로 「신학의 생태학」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윤리신학의 어제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내일도 점쳐볼 수 있을것이다.
기초와 원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윤리학은 그 기초와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와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그분은「볼 수 없는 하느님의 형상」으로서(골로1,15) 인간의 참된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시다」(요한 14,6).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기초 위에 새로운 삶을 시작 했으며(갈라 1,6~10참조) 더불어 사는 이웃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된다(골로 1,23 참조), 그 실제적 내용이란 인간의 윤리가 하느님과 인간과의 화해 (회개 )이며 이 화해의 원리로 이웃과의 화해 (이웃 사랑)를 함으로써 확인 되는 것임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시작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회개」「믿음」의 내용들을 설명하고 이 내용에 부합되는 삶이 윤리적이 것이고 이에 반대되는 것은 비윤리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바로 이런 내용들을 사람들에게 전해준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이해하고 전수한 모든 윤리규범이나 가치들이 위의 기준에서 새롭게 판별되고 평가되는 것이며 이는 칭찬, 훈계, 경고, 단절 내지 거부의 언어로 제시되고 있다. 구약성서는 물론이고 신약성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주석하고 재해석해서 「성서윤리」혹은「하느님의 계명」으로 실천윤리에 적용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 안에는 윤리의 기초와 원리가 들어 있으며 동시에 살아있는 교회가 구체적이고 실제적 상황에서 하느님 백성에게 믿음의 삶을 전달하고 이웃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줌으로써 토착화되는 과정과 방법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리스도교 윤리 토착화
그리스도교 윤리의 기초이며 원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열두 제자는 문화적이며 역사적 상황으로 볼 때 로마제국의 영토 안에 있는 팔레스티나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인간 구원의 길을 가르치셨다. 이는 곧 그들의 가르침 안에는 불변적 원리와 기초가 있지만 가르침의 내용이나 방법들 중에는 그 시대와 환경에 속하는 것들로써 그 지역과 문화에 한정되고 변화되어야 할 것들도 있다(예컨대 유대인의 풍습과 생활규범들). 그러므로 이 기본적 가르침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권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위하여 선교지의 언어로 표현되고 바르게 전달되었는지는 새로 믿게 된 사람들의 표현 곧 응답적 삶 안에서 확인해야 되었던 것이다. 또 이 만남에서는 일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부족하고 기존 문화와 풍습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판단이 뒤따르게 된다, 이는 보통으로 호교론적성격을 띠게 된다. 이렇게 하여 개종한 사람들은 진정한 변화와 발전을 맛보게 되었으며 이 새로운 가르침과 삶을 그들이 지니고 있던 언어와 풍습으로 새롭게 포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대 교회의 그리스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은 「참종교」, 「참 예배」, 「그리스도교철학」, 「참 진리」등으로 표현하며 기존의 지식과 예배와 풍습들을 취사 선택하며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아간다.
그러나 이 시대의 유럽대륙은 민족이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고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기존 문화를 파괴한다. 이 새 침입자들을 문화적이며 종교적으로 가르치는 역할은 그리스도교가 담당하게 되고 복음의 제3세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윤리신학은 많은 발전을 하게 되는데 희랍과 라틴문화에서 전수한 덕목들을 사회의 새 주인들에게 전수하며 실제로 여러 가지 윤리 규범들을 가르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중세기는 준비되었으며 새로이 슬라브 민족들에게 선교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제2선교 세대는 그리스도교의 원초적이며 기본적 윤리가치들이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위에 있던 사회로 전이되면서 부각된 특성은 지성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고 당시 종교인들에게는 무능이었다(1고린1, 22~25)라고 설파한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제3세대는 다른 양상이 된다.
정착한 그리스도교 사회에 침략자로 들어온 게르만족들은 문맹인이고 야만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피지배자로 혹은 정복자의 스승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했다. 이는 이론보다는 삶의 모범과 생활규율을 통해서 그들을 교화시키는 방법이 우선이었다. 소위 중세 암흑기라 하는 시대는 이 기초교화 시기였으며 중세기의 문예부흥의 준비시기였다고 보아야 한다.
학문으로서의 윤리신학
교화된 게르만 민족들은 신성 로마제국을 건설하고 사회제도와 풍습을 건설하고 사회제도와 풍습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하며 십자군 전쟁으로 새로운 문화에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하여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이루고 오늘의 대학제도의 기틀을 놓으며 신학 총서들을 발간하게 된다. 13세기에는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신학을 탐구하며 윤리신학 분야도 많이 정리된다. 그 효시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제2권 이다.
이렇게 신학이 전문적 학문으로 발전하면서 각 분야들은 독리적 발전의 기틀을 놓게 되었다. 16세기 이후 윤리신학은 신학적 윤리학과 계명(십계명 중심)의 해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인 성사생활 등으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 때 「윤리신학」이란 명칭도 얻게 되며 이것이 20세기 중엽까지 가톨릭 교회 윤리신학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17세기부터는 결의론적 성격이 지배적이다.
개신교 계통에서는 윤리신학을 신학이 독립된 분야로 다루게 되는 것이 19세기 이후부터이며 기독교 윤리학이란 명칭으로 다루고 있고 신학과목의 구분이나 방법론이 가톨릭과 다른 것을 강조하는 것이 특색이어서 이 시기에는 윤리신학과 직접 관련을 짓는 것이 어렵다.
교본과 새로운 상황
가톨릭의 윤리신학은 17세기 이후 신학교 제도와 함께 사목자 양성과 고해성사 집행에 도움을 주는 학문으로 편향되어 교회법과 결의론 중심의 연관성 안에서 다루게 되어 진부한 결의론 적 상황 설정과 판단에 치중하고, 복음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 이해의 폭은 등한시하였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신화의 발전과 특히 「신학의 영혼과도 같은」성서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윤리신학은 성서 윤리의 기초로 큰 변화를 맞게 되었으며 보다 원천적이고 근본적 그리스도교 윤리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한국교회 윤리신학
신앙의 전래와 윤리신학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적극적으로 전래된 것은 18세기 말엽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유럽의 문화권에서 교육받은 선교사들에 의해서이다. 이러한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제약은 한국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특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선교사들은 교과서적 윤리신학을 배웠고 식민지 정책의 문화권에서 양성되었으므로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보며 선교 열의와 순교 정신이 가장 크고 인상적 윤리 가치였다고 본다. 윤리 생활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론과 구세주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과 묻히심에 함께 하여 부활에 동참하는 것으로 박해시대의 윤리를 요약할 수 있겠다.
박해 시대. 그리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신학을 교수하는 신학교의 개교로 윤리신학은 한국에 전달되었으나 라틴어로 된 교과서 독해에 머무는 수준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계율적 측면에서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규범들을 배우고 전달하는 상황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권 내지 3권으로 된 교과서는 기초 윤리신학과 특수 윤리신학 혹은 윤리신학 각론으로 되어 있었다.
보유론과 윤리신학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달되는데 큰 역할을 한 보유론은 윤리신학에도 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 윤리도덕적 측면에서 한국의 초대 교회나 세계의 고대 교회에서와 같이 덕목이나 계명에서 유사한 것을 대비하여 설명하고 해명하기도 하였다(예컨대 사추덕(四樞德)과 사단(四端)의 대비).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는 윤리신학은 17세기 이후 유럽의 신학이 전개해 온 교과서 중심의 결의론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반적인 성향이었다.
한국의 윤리신학 현황
한국교회의 역사가 짧듯 신학의 역사도 짧으며 더구나 학문으로서의 윤리신학 수준은 미약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거와 같이 교과서적 틀도 없고 산만한 주제별 글들도 전문화되어 있지 않아 구미사회의 서적들과 잡지 들에 의존하고 있다. 기초 윤리신학에 관계되는 서적들은 70년대부터 차차 소개되고 있으며 주제별로는 생명윤리, 의료윤리, 사회윤리 등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윤리신학을 전체적으로 다룬 책으로서 번역된 것은 분도 출판사의 「그리스도교 윤리」1~3권이 있다.
개신교 측에서는 종합적으로 다루는 책이 아직 소개되지 않고 번역서로는 「신약성서 윤리」라든지 「기독교 윤리학」「상황 윤리」「사회 윤리」「의료 생명윤리」등이 있다. 이러한 책들은 주로 미국에서 발표된 책이나 잡지 글들을 모은 것이다.
토착화와 윤리신학
정신적 혁명과도 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제도, 사상, 풍습 등을 일신하고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럼으로 해서 신학의 전 분야가 교과서는 더 이상 출판하지 않고 새로운 노선과 벙법을 시도하도록 고무되었다.
윤리신학도 이제 근원으로 돌아가서 새 출발을 하도록 했으며 무엇보다도 성서와 살아있는 교회의 전통에서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에서 지혜와 힘을 얻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고대 교부들이 기존문화와 전통을 활용하여 그리스도교 문화와 전통을 이루어냈듯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을 활용하여 신학을 전개하고 복음의 토착화에 일조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토착화는 구호나 짜집기로 되는 것이 아니고 깊은 연구와 성실한 신앙생활로 얻어지는 은혜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전망
불변적 복음의 가치와 가변적 규범과의 조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와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그의 복음에 대한 깊은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앙의 빛과 신앙 공동체와 교도권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 안에서 불변적 진리를 깨우치면 바로 그것이 살아있는 진리로 나타나게 되고 자신과 이웃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인류 공통의 윤리적 가치와 진리의 규범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전통적 관습과 도덕률을 바르게 평가하고 종용하며 취사선택하여 발전시키고 시대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며 새로운 생활 규범도 창출해 낼 것이다. 규범은 바뀌고 변화되면서 그를 통해서 불변적인 윤리가치는 보존되고 증진될 것이다.
우리 가치의 발견과 규범
사회의 모든 윤리 규범은 그 가치가 확인되고 합리적으로 확신되지 않으면 타율(他律)로 남거나 형식적인 전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으로 윤리신학이 토착화되기 위해서는우리 문화와 민족의 전통안에 남아 있는 풍습 규범들과 윤리적 가치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는 보조학문들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예컨대 민족학, 인류학, 사회학, 종교학 등과 자연과학의 연구들로 알게 된 사실들에 바탕을 둔 합리성이 전제 되어야 한다. 무지는 맹목적 신앙이나 추종을 강요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방해하거나 제한하기 때문이다. 특히 동양이나 한국의 인성론과 덕론에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양이나 한국의 윤리학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교회적 양심의 함양
위에 논한 것이 윤리의 외적 조건이라면 양심은 내적 조건이고 본질적 요소이다. 인간의 윤리성은 궁극적으로 양심에 달려있다. 아무도 자기 양심을 거슬려 행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양심의 판단은 윤리적 인식을 전제하게 된다.
윤리적 인식은 어떻게 얻게 되는가? 교육을 통해서이다. 타인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옳게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나 스스로 옳은 삶을 살지 않고는 참된 윤리적 가치를 체험할 수 없고 체험하지 않은 윤리 가치는 살아있는 가치가 아니다. 마치 말은 들음으로만 배우지 못하고 들은 말을 반복하거나 체득하고 표현함으로써 완성되듯 윤리적 가치도 모범을 보고 자기가 뒤따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복음적 진리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 얻어지고 힘있게 이웃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서구에 있어 윤리신학을 토착화한 학자들이 모두 성인들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진리도 가설이 실험을 통해 확인되듯 윤리도 양심도 실제 삶을 통해 확인되고 검증되어야 참된 진리이고 참된 학문이 될것이다.
한국에서 윤리신학이 올바로 토착화되기 위해서는 전통적 문화와 풍습에 대한 깊은 이해와 복음의 진리에 의한 해설을 할 수 있어야 할것이며 참 삶의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이해와 깊은 신앙이 자신들의 생활을 통해 스스로 확인되고 고백해야 할것이다. 이 두 가지 방향의 만남이 곧 진정한 토착화이며 윤리신학의 나아갈 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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