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은 다른 죄인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자기 죄 때문입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죄인 사정은 죄인이 더 잘 알고 용서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역시 선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높은 선을 가진 분은 죄인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를 들추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바로 그 대표적인 분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 성서의 내용입니다.
어떤 학자가 죄수들을 시험하는데 한 청년을 간통한 남자로 꾸며 강력범들이 수감돼 있는 감방으로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자 감방안의 모든 죄수들이 신이 나가지고 별의별 방법으로 그 청년을 괴롭혔습니다. 너같은 놈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면서 온갖 욕설과 비난을 하더랍니다. 자기들 안에 지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그 청년을 똑같은 죄목으로 위장을 해서 죄없이 억울하게 갇혀 있는 이들의 감방에 넣어 보냈더니 아무도 그 청년을 괴롭히지 않더랍니다. 누구도 청년의 죄를 따지거나 묻지 않았으며 오히려 감방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서 친절하게 도와주며 위로하더랍니다. 자기들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듣고 우리 모두가 그와 비슷한 체질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군대생활 할 때도 보면 대개 졸병들에게 심하게 기합이나 주고 몰인정하게 다루는 것은 역시 사고자들이거나 말썽꾸러기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른 문제를 참아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정과 사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죄인이 더 찍어 누릅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 43, 16~21)는 바빌론의 유배생활을 끝낸 유다인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말씁입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불신양과 죄로 인해서 나라를 빼앗겼으며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은 궁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간다 해도 희망이 없었으며 보이는 미래가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해 대해 심한 자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라」고 하시며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우리의 잘 못된 과거를 들추지 않으십니다. 깨끗하게 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가 아무리 커도 그분의 자비와 사랑은 더욱 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잘못이 있었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쳐서 벌떡 일어서야 하며 또한 남의 잘못이 있으면 하느님의 애정으로 덮어주고 용서해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간음 했던 여인은 원래는 돌로 쳐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죄인이 죄인을 더 비난하며 용서하지 못하고 박해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물론 간음한 여인의 죄도 큽니다. 벌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더 크고 위험한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사람들의 위선과 오만입니다. 오늘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자기들 딴에는 완벽한 모략을 꾸몄습니다. 거기에 간음했던 여인이 도구로 등장하는 데 세상없는 예수님도 그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믿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걸리고 저렇게 해도 걸리도록 그들은 예수님을 유도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여인을 「돌로써 쳐 죽여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자가당착이 되어 자기 모순을 범하게 되며 또 유다인에게는 사형선고의 권리가 없으므로 로마법에도 저촉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인을 「용서해주라」고 하신다면 이는 하느님의 율법을 정면에서 거스리는 행위며 또한 음행을 장려한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역시 주님이셨습니다. 「너희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시자 다 도망갑니다. 그 기세 등등하던 자들이 비굴하게 내뺍니다. 왜냐하면 진짜 죄인은 바로 자기들이라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와 간음했던 여인을 매장하려 했지만 그러나 망신을 당한 것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너나없이 용서받은 죄인들이며 또 앞으로도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이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판단하려면 먼저 내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야 합니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를 나눌 수 있는 자비를 가져야 합니다. 성서에 보면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야고 2, 13 참조).
사순절은 서로 용서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께서 특히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웃에게 그 용서를 나누는 시기입니다. 아무에게도 돌을 던지지 맙시다. 그 누구에게도 죄인으로 몰아대지 맙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돌을 던지지 아니 하시고 우리를 죄인으로 판단치 않으십니다. 자비를 가집시다. 그러면 우리는 더 큰 죄를 용서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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