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암이 확실합니다. 전문의를 찾아 수술을 받도록 하십시오」
1994년 9월 어느날 내가 병원에서 종합 진찰을 받고 나온 후 그 병원을 찾아간 내 남편에게 들려준 의사의 말이었다. 나는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차분히 가라앉은 태도 속에 가리워진 질은 고뇌를 어루만지면서 미소를 지어보여야 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길고 무더운 계절이었다. 그래서인지 장례 미사도 자주 있었다. 나이 많은 분들은 물론 40, 50대의 한창 나이에 불의의 병이나 사고로 돌어가신 분들이 많았다. 몇달 전에 건강한 모습으로 만났던 대녀가 서울병원에 종합 진찰을 받으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은데 위암수술을 받고 와서 그 무더운 여름에 장례를 치렀다.
7월 어느날이었다. 장지에서 먹은 음식 탓인지 배가 몹시도 아팠다. 소화제를 먹고 저녁도 거른 채 일찍 잠을 청했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통증 때문에 밤 10시가 되어 병원 응급실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음식을 잘못 먹은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주사를 맞고 집에 왔다.
며칠 후 다시 배가 아파 계속 병원에 다녔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종합 진찰을 받은 결과 「장폐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작은 창자의 일부가 막혔다는 것이다.
계속 치료를 받았으나 나아지기는커녕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심한 통증과 함께 설사를 했고 체중이 계속 줄어 들어 35㎏도 되지 않는 흉칙한 몰골이 되었다. 대장암 검사를 해 보라는 의사의 권유로 방사선과를 찾아 두번이나 종합검사를 받았다.
「대장에 혹이 나있으니까 수술을 해서 혹을 떼어내고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악성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전문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야겠습니다」
방사산과에서 내려진 진단이었다. 그런데 내가 집에 돌아온 후 남편을 부른 의사는 대장암 말기가 확실하다는 진단결과를 들려줬다.
이튿날 성당을 찾아 홀로 성체 앞에 앉았다. 성체 앞에 이중삼중으로 어른 거리는 가족들의 모습을 응시하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껴야만 했다.
「예수님, 이제 저는 당신 곁으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당신께서 부르시는 길이라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선물로 베풀어 주신 육남매를 어째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직 그들은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단 하루도 편히 살 수 없는 어린 학생입니다. 그들에게 제가 없어도 되는 것입니까? 당신께서 잘 보살펴 키워 주신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과 이별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나의 입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와 함께 나의 시야에 가득히 떠오르는 큰딸의 모습-뇌성소아마비로 정신 미숙과 반신불수가 되어 지금 작은 예수회공동체에서 살고 있지만 언제나 엄마를 그리며, 묵주알을 돌리면서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기도하고 있을 우리 마리나-이 애를 남겨 둔 채로 나는 하늘나라로 떠나야만 하는 것일까.
올해 26세가 된 큰딸 평재(마리나)는 태어난지 7개월만에 대학병원에서 뇌파검사를 받고 뇌성 소아마비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지난 26년 동안 내가 마리나를 업고 각지로 돌아다닌 발자국들과 목구멍으로 삼킨 눈물의 기억들을 어찌 다 헤아릴 것인가?
국민학교 교사였던 나는,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만나 혼인성사를 받은 지 2년만에 하느님께서는 예쁜 딸을 선물로 베풀어 주셨다. 나는 얼마나 많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는지 모른다.
건강하고 귀엽게 자라던 마리나는 7개월이 되는 어느날 아침 갑자기 경기 중세를 일으키며 숨을 쉬지 않았다. 허겁지겁 병원에 달려갔을 때는 멀쩡하게 웃으며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의사는 별일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그후 그런 증세가 자주 있었고, 밤이면 심하게 울었다. 나는 딸을 업고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좋다는 소문이 들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가느다란 희망에 설레이면서 찾아가고 한숨과 눈물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 매일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이 쓰라린 발걸음의 받침 위에서 숨쉬며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는 마침내 7개월된 어린것을 업고 서울대학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참으로 오랜 시간 뇌파 검사를 하였다.
「뇌성 소아마비입니다. 별다른 치료 방법이 없으니, 처방해 드리는 약을 받고 가서 복용하도록 하십시오. 차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오 하느님, 나는 부동 자세로 서 있는 채 의사의 진단결과를 똑똑히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어린것을 등에 업은 채 병원문을 나선 나는 어떻게 길거리를 헤매었는지, 그 발걸음들을 찾아낼 수가 없다.
「하느님, 참으로 당신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래도 내 딴에는 중학생때 세례를 받은 후 열심히 당신을 따르려 힘썼고 교회 일도 부지런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남편도 법 없이 살아 갈 만큼 착한 사람이라고 주위에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께서는 꼭 이러한 십자가를 저에게 지워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까? 당신 사랑의 참뜻을 깨우치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당신께서 허락해 주신 내 귀여운 딸을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저의 고통을 봉헌해 드린다면, 당신께서 충분히 보살펴 주시겠다는 뜻입니까?」
나는 북받쳐 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마리나는 약의 효과인지 울지는 않았고 제대로 잠도 잤다. 그러나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자리에 앉혀 주면 가만히 앉은 채로 왼손으로만 장난감을 만지며 오른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오른손과 다리는 발육을 멈추었고 점점 졸아들어 갔다. 나의 마리나는 뇌성 소아마비로 정신 미숙과 반신불수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 마리나가 작은 예수회 공동체에서 나날을 평화롭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감사의 기도 속에서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나의 지난 날을 응시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나는 1942년에 태어났다. 자라나면서 아래로 남동생 셋과 여동생 넷을 거느린 여덟 남매의 맏이가 되었다. 어머니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려고 무던히 애쓰며 동생들을 보살폈던 일들이 짙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 지금도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보게 하고 있다.
꿈많은 소녀 시절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일이 생기게 되었다. 열 다섯 살, 중학생 때, 그 성탄 전날에 세례 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딸로 다시 태어난 일이었다.
「예수님, 매일 당신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이리하여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려고 노력을 했고 기도를 했다. 고등학교(당시 사범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 무렵에 제주도에 처음으로 도입된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였다.
「먼 동이 트이듯 나타나도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이 기도문은 초창기 때와 번역이 다름) 나는 얼마나 성모님께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었을까? 기도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늘 읊으며 다녔고 황홀한 마음으로 성모상을 바라보곤 하였다. 지시하는 대로 서기를 맡아 회의록도 기록하였고 방문 활동도 하였다. 이것이 훗날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한히 베풀어 주실 은혜의 작은 터전이었음을 나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그렇게 바라던 국민학교 교사가 되었다. 벅찬 기대와 함께 올바른 교사의 길을 걷게 해주시도록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나의 교사 생활을 가장 기뻐해 주신 어머니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 것인가?
27세가 되었을 때, 오늘의 나를 만들어낸 결정적인 일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만난 지금의 남편(김영환ㆍ베드로)과 혼인성사를 받은 일이었다. 나는 한 사람의 아내로 다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벅찬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지 모른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모시는 가정이 되게 해 주시도록 열심히 기도하면서 집안을 알뜰히 가꾸어 가려고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뇌성 소아마비가 된 첫딸을 업고 각지로 돌아다니면서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어느새 다섯 딸과 한 아들, 1남5녀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하느님, 당신께서 선물로 주신 이 자녀들이 단신 뜻에 맞갖게 자라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힘도 없는 나약한 여자입니다…」
영성체를 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를 드렸고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이들을 잘 키우리라 다짐하곤 하였다. 그래서 직장도 그만 두고 집안 식구들을 돌보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계에 적자가 생기도록 힘썼다.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때면 아주 작은 일에서도 그 분이 주시는 커다란 기적들을 볼 수 있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에서도….
「하느님, 이 음식은 당신이 주신 귀한 자녀들이 먹을 음식입니다. 솜씨도 없고 재료도 풍부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 손길이 닿을 때, 가장 맛있고 영양가가 있는 음식이 되어 우리 식구들이 당신 사랑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 나아갈 것입니다」
어느날 중학교 다니는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이런 질문을 하였다.
「엄마, 김치에 뭐 넣고 담갔어요?」
「왜 그래?」
「우리 반 애들이 김치 맛있대요.」
「그래? 하느님 사랑…」
그것은 시장도 못 간 채 집에 있는 고추, 마늘, 멸치젖국, 다 세 가지 양념만 가지고 담근 김치였다.
「예수님, 성모님, 김치 재료가 빈약 합니다. 당신 손길로 맛있는 김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즐거운 마음으로 담근 김치였기에 빈약한 재료에도 불구하고 좋은 양념을 쓴 김치보다 맛있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또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에 늑장을 부려 늦게야 등교하는 딸에게 큰 소리로 짜증을 부려 딸애는 울면서 학교로 갔다. 그리고 나는 하루종일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딸의 옷과 양말을 빨면서 용서해 달라고…하루종일 화살기도로 지냈다.
저녁 때가 되었다. 축 늘어지고 지친 얼굴로 돌아오리라 예상했던 딸이 너무 환한 모습으로 들어오면서,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 기적을 보여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싶어 양말만큼은 세탁기가 아닌 손으로 빨았다. 매일 벗어 놓는 것이 양말이니까 그것을 빨 때마다 화살 기도로 가족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저녁이면 잠든 자녀들 가슴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한다. 우선 이 엄마 때문에 상처 받은 일,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서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를 하고 나서야 나도 잠을 이를 수가 있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 나는 교회의 일에 열심히 참가하였다. 교육과 피정에 쫓아다니면서 신앙심을 확고히 하기에 힘썼고, 매일의 미사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레지오 마리애 단장을 계속하면서 성령묵상회에서 봉사활동을 하였고, 꾸르실료 임원도 하였다. ME 지도자 과장을 마치고 나서 브릿지 과정을 인도하기로 하였다. 다미안 외원들과 소록도에 가서 3박4일 동안 한센씨병 환우들과 생활하면서 사람을 통해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얼마나 절실히 체험하였던 것일까?
「역겨움이 변하여 단 맛이 되었습니다」라는 프란치스코성인이 유언을 묵상하며, 나는 참으로 하느님의 단 맛을 느끼기도 하였다.
내가 이처럼 교회 활동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학수 있었던 것들이 얼마나 크신 은총이었을까?
교회 주보나 소식지를 통해 알게 된 피정이나 교육에 참가하고 싶어 기도를 하고 있으면 언제나 자연스럽게 그러한 길을 열어 주셨다. 나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돌보아 줄 분이 나타나거나, 아니면 내 자녀들이 나를 대신하겠다고 자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피정에 참가할 수가 있었다.
우리 집안에 내가 없을 때 우리 가족들은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내가 움직이는 곳곳에 내 남편과 내 자녀들의 희생이 어리어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걱정 없이 피정에 다녀올 수가 있었고 교회 활동에 열성을 기울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이런 일을 통하여 나의 자녀들을 더욱 사랑 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헌신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불구가 된 딸을 선물로 주신 것도 하느님의 은혜임을 확신하면서 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마리나를 생각한다. 이런 때 느끼는 마음 속의 벅찬 기쁨을 어찌 아무라도 체험할 수 있을 것인가?
생후 7개월만에 뇌성 소아마비 진단을 받고 돌아온 마리나는 5세가 지나도록 밥을 먹지 못하고 쌀가루로만 살았다. 내가 낮에 출근한 동안에는 친정어머님이 돌보아 주셨다.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애를 많이 태웠을까? 나는 퇴근하고 와서는 매일같이 마리나를 들쳐업고 침술 의원을 찾아 다녔다. 엄마의 팔에 안긴 채 그 어린 것은 온몸에 침을 꽂고는 한 시간씩 치료를 받아야했다. 이런 생활이 2년이나 계속 되었고 그렇게 치료한 결과 7세가 되었을 때는 왼손을 잡아 주면 겨우 일어서서 왼쪽 다리로 뒤뚱거리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른손과 오른발은 마비가 되어 쓰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미숙으로 말도 더듬거리며 한 두마디 겨우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 무렵에 물리치료기를 사다가 매일 치료하였고 내가 출근해서 못할 때는 품삯을 주셔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부부 교사로 맞벌이를 한다고 했지만 생활은 늘 쪼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내 딸 마리나를 위해 뭔가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였다.
이렇게 치료를 하고 정성을 기울인 효과였는지 10세 가 되면서 혼자서 화장실에 가게 되었고 왼손만으로 옷을 입고 세수를 하거나 밥을 먹으면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으로 가르친 결과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혼자 앉아서 성경책을 한 장씩 넘기며 더듬거리면서 읽었다. 그러는 동안 성경책 한 권이 거의 다 닳아졌다. 그리고 왼손으로 겨우 연필을 잡고 자기이름과 식구들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내 딸 마리나를 그렇게 애태우며 돌봐 주시던 친정 어머니께서 돌아 가셨다. 8남매를 키우시느라 다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던 나의 어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렇게도 꿈이었던 교사를 그만 두고 퇴직해야만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모두 놓치는 어리석음을 그만 두고 집안식구들 뒷바라지만 하기로 결심하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마리나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15세가 된 마리나는 정신미숙과 반신불수일 뿐 천사처럼 맑고 순결한 내 딸임을 새삼스레 느끼면서 이제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열심으로 찾았다.
고통받는 사람들 위한 삶 살기로 결심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내게 와서 편히 쉬어라」는 예수님 말씀에 감사를 드리며 더욱 그분께 의지하리라 결심하였다.
그 당시 제주도에는 장애자들이 갈수 있는 학교가 맹아학교(지금은 영지학교)뿐이었으므로 이 학교를 찾아 교장 선생님께 사정하여 입학시켰다. 통학에 불편을 느껴 기숙사에 맡겨 놓고 와서 나는 밤새도록 눈물을 삼키며 울었다.
「마리나야 너를 낯선 곳에 두고 나는 편히 집에서 자고 있구나. 그러나 어미의 찢어지는 가슴을 누가 알아줄 것이냐? 마리나야 부디 건강하게 살면서 공부해 다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영지학교를 찾아갔고, 눈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집에 데려 와서 같이 살면서 택시로 통학을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졸업을 하게 되어 졸업식장에 갔다. 여기서 만난 수많은 장애자의 부모님들. 그분들의 한맺힌 눈물을 보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울부 짖었다.
「하느님, 이 분들이 무슨 죄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같이 어질고 착하기만 한 분들인데 어찌하여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까? 장애자 자녀를 가졌기 때문에 소외당하고 한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당신께서 위로해 주시지 않는다면 누가 위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성모 어머님, 이들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나는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영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마리나를 업고 9세의 딸과 함께 첫영성체 교리반에 열심히 다녔다. 그리하여 영성체로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서 많은 변화가 왔다. 매일 성당에 가고 싶어 했고 집에서 묵주의 기도를 따라 하였다. 어쩌다가 가족들이 기도하는 시간을 잊어버릴 때면 더듬거리는 소리로 「엄마, 묵주의 기도 할 시간인데…」하면서 깨우쳐 주곤 했다.
무엇이든지 배우고만 싶어하는 마리나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던 중 서울에 있는 장애자 특수시설을 소개받았다. 특수 교육을 받기 위해 여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불구의 딸을 업고 가서 기숙사에 두고 오던 날, 그 날의 괴로움을 나는 나타낼 길이 없다. 마음만이 아니라 온몸이 너무 쓰리고 아파서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겨우 버스를 타고 동생네 아파트에 이르렀을 때는 완전히 넋이 나간 삶이 되어 마리나의 이름만 되뇌이고 있었다.
「하느님, 불구의 딸을 이 낯선 서울에 버려 두고 혼자 집에 가고 되는 것입니까? 그러고도 에미입니까? 나의 주님 제 마음을 좀 밝혀 주십시오. 너무 아득하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서울에 있는 특수시설에서도 오래 살지 못하게 되어 집에 데려 오고 말았다. 옆에 딸애가 있으니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고 밥맛도 좋아졌다.
마리나가 18세 되던 해에 북제주군에 장애자 특수시설이 세워졌고 여기에 가서 살게 되었다. 마리나를 거기 데려다 주고 오던 날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룻밤을 울음으로 지새웠다. 딸애가 보고 싶어 찾아가 보면 묵은 정부미로 맛없이 지어진 밥을 반찬도 없이 먹는 장애 어린이들 앞에서 나는 미어지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집에 와서는 좋은 새쌀로 지어진 우리집 밥이 차마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흐르는 눈물에 말아 삼킨 적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감사 기도보다는 분노와 원망의 마음만 앞섰다.
「예수님, 성모 어머님, 이 불쌍한 장애 어린이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저는 가진것이 없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내딸 마리나가 수호 천사가 되어 이 시설에 관여하는 모든 분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그들이 사랑으로 이 시설을 운영하게 하여 주십시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부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곳을 찾는 후원자도 많아졌다. 특수학교도 인가를 받아 훌륭한 선생님들 밑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으로 내 마음의 허전함을 채울 수는 없었다. 내딸 마리나는 성가 부르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평생 기도하며 성가를 부르고 성경만이라도 읽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였다.
나의 절실한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인가? 1993년 3월에 제주시에 작은 예수회 자매 공동체가 생기게 되었다. 수녀님들이 장애인들과 함께 소공동체를 이루어 정상인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함께 삶의 기쁨을」이라는 이상으로 세워진 곳이다. 마리나는 이 공동체에 들어가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집에서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어 마리나를 보고 싶으면 언제나 찾아가서 만날 수가 있다. 성가를 부르고 묵주의 기도를 열심히 하는 딸애를 보면서 언제나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사랑하는 마리나야 이젠 이 엄마가 눈을 감아도 걱정이 없게 되었구나. 네가 평생 기도하며 살아갈 곳이 생겼으니…. 이 엄마가 오래 오래 살아 너만이 내딸이 아니라 12명 장애천사들 모두를 내딸로 보살펴야 하겠구나!」
마리나와 함께 기도하면서 벅찬 환희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지난 설날 마리나가 집에 와서 일주일 동안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지었다. 집에 도착하자 마리나는 불구가 아닌 왼팔로 엄마를 꼭 껴안았다.
「엄마를 위해 기도 많이 했어」
더듬거리는 말을 하고는 참으로 기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아, 사랑스러운 나의 마리나, 네가 있기에 하느님은 우리 가정에 무한한 축복을 내려 주고 계시는구나!
마리나는 아빠, 엄마, 동생들과 즐겁게 식사도 같이 하면서 지냈고, 저격 때면 모여 앉아 함께 기도를 하였다. 잠을 잘 때면 왼손에 묵주를 들고 한참이나 혼자 기도를 드리다가 잠이 들었다. 나는 잠든 내 딸의 평화로운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 가정을 지키시는 성모님을 연상하였다.
드디어 작은 예수회로 돌아 갈 날이 되었다. 아빠는 하루 더 있다가 가라고 아는데 마리나는 오늘 가야 한다면서 자기 옷보따리을 챙긴다. 나도 거들어 주면서 데려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전화 벨이 울렷다. 작은 예수회의 수녀님이었다.
「마리나 언제 데려와요?」
「왜 그러세요?」
「마리나가 없으니까 우리 천사들이 영 공동기도가 되지 않아서 그래요. 빨리 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목이 메이면서 거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에서는 별로 할 일을 찾지 못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이는 마리나가, 장애 천사들의 공동체 안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벅찬 환희를 예수님, 성모님께서는 잘 아시고 계시리라. 아니, 예수님 성모님께서 우리 집안에 내려 주시는 크나큰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감격의 눈물로 안으로 삼키며 마리나를 데리고 나섰다. 왼손을 잡고 걷는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마침 보슬비가 촉촉히 애리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 모녀를 어루만져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인 것인가?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생각해 보니 지난 26년 동안 마리나를 업고 헤매어 다닌 거리가 얼마나 될런지 아득하기만 하였다. 한숨과 피눈물을 발자국으로 디디며 헤매인 거리. 마음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할 때는 하느님을 무척 원망하기도 하였다.
「내 딸을 치유해 주소서!」
그러나 그것은 허공에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참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느낄 줄 모르는 일급 장애자로 살아 온 것이 아니었던가?
「나의 하느님, 나의 어리석고 불충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참으로 크신 사랑으로 오늘까지 나를 길러 왔음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이 선물로 주신 마리나를 통하여 깨우쳐 주시고, 기쁨과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부디 내 딸이 장애 천사들과 함께 늘 기도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십시오」
94년 9월 대장암 진단을 받고 문득 헤아려 보니 내 나이 53세, 20년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나이와 같았다.
성체 조배를 하면서, 눈앞에 가득히 떠오르는 어머니 모습을 응시하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얼마나 오래 성체 앞에 앉아 있었을까? 당신의 음성이 들였다.
「사랑하는 내 딸 리따야, 쉬지 말고 기도하여라. 그리고 지금까지 다니던 한의원을 찾아가거라」
나와 가족들은 무겁고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만 하게 되었다. 방사선과 의사는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데,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고 병이 나아질 수가 있을까? 운명적인 결단의 시간에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의 결심대로 따라 준 가족들과 마음을 합하여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였다.
35kg도 안 나가는 앙상한 모습으로 한의원에 다니며 침 치료를 받고 지어주는 약을 사다가 복용하였다. 누워서 침 치료를 받고 나면 일어날 기운이 없어 그 자리에서 그냥 한 시간 가량 자고 나서 겨우 일어났다.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설사를 하기 때문에 몸은 더욱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야위어 갔고, 영양제 주사를 맞으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내가 속해 있는 재속 프란치스코 제주형제회 회원들과 레지로 단원, 그 외의 교우들이 매일 우리집에 와서 기도를 함께 하였다. 그 무렵, 성령 묵상회 피정에 참가하여 신부님께 총고백을 하고 안수를 받고 돌아오니 내 마음은 매우 가벼워 졌고, 기쁨과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심한 고통과 설사는 멎지를 않았다.
54일 묵주의 9일 기도가 계속 괴었다. 아침 10시 30분이면 어김없이 기도를 시작하였고, 사정이 있어서 참가하지 못한 분들은 자기 집에서 기도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숨을 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통증이 찾아오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많은 분들을 위해 내 육신의 고통을 봉헌 하였다.
내가 용서를 해야 될 분, 용서를 청해야 될 분들을 헤아리면서 또한 고통을 견뎌 내였다. 잠자고 일어나고 집안일을 하고, 침 치료 받고 약을 먹는 일이 모두 기도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런 생활이 이어지면서 몸이 차차 나아지기 시작하였고 12월이 되면서는 음식도 먹을 수 있었으며, 통증과 설사가 멎어갔다. 나의 귀여운 자녀들에게 아직은 내가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깨우치시는 하느님의 뜻일 것인가? 나는 점점 회복되어 갔다.
한의원에 다니기 시작한지도 5개월이 경과하였다. 그 동안 참기 힘든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유혹에 시달렸는지 모른다. 몸에 침을 꽂고 앉아 있을 때의 통증을 내가 어찌 견디어 내었을까?
그러나 이제 심한 고통도 사라졌다. 1995년 1월이 지나면서 거의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육신은 고통이 전혀 없고 체중이 10kg이나 불어나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고 혈색도 좋아졌다. 나를 치료하는 한의사는 이제 병이 다 극복 되었다고 말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혹은 기적이라고 놀라기도 한다. 한의사에게 치료를 받도록 결단을 내리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기도 하시는 분들을 기억해야 한다. 존경하는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 수녀님들 그리고 애가 알지 못하는 많은 교우들까지 나를 위해 기도하였음을 알고 있다. 특히 주교님께서는 내 남편 베드로를 만날 때마다 말씀하셨다.
「리따씨의 병이 어때요?」
「차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내가 매일 기도 하고 있어요」
심지어는 우리집에 오셔서 기도하시겠다는 주교님을 내 남편은,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하기에 애를 먹은 적이 여러번 있었다. 내가 무엇이길래 주교님까지 그렇게 걱정하며 기도해 주신다는 말인가? 나는 반드시 병마를 이겨내고 이 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고통받는 사람들께 봉사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몇 년 전에 여성연합회에서 주관하는 1박2일의 피정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점심을 먹고나서 한 시간 동안 자유로이 묵상을 하라고 했다. 나는 건물 옆의 돌담길을 걸으며 홀로 묵상을 하였다. 문득 곧게 쌓여진 돌담이 눈에 들어 왔다. 많은 돌덩어리들이 쌓여 있었지만 그것은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받쳐 줌으로써 훌륭한 돌담 울타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도, 나의 딸 마리나도 결코 섬처럼 외로이 떨어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웃들이 떠받쳐주기 때문에 이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을 잘 떠받쳐 주어야만 사는 보람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우리 가정에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고 슬기롭게 자라면서, 차례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에 있는 일류대학에 재수 한 번 없이 합격 해 주었고 장학금까지 받으며 잘 다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리나가 다른 장애 천사들과 더불어 제 몫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나는 당신 사랑을 깨우쳐 주시려고 온갖 고통과 시련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집안을 풍성한 사랑으로 감싸 주시리라 굳게 믿는다.
「예수님, 성모님, 감사합니다. 모든 흠숭과 찬미를 영원히 받으십시오」
아멘.
<끝>
◆당선소감
“주님께 찬미와 영광드립니다?
오늘도 고통받는 이들과 더불어 내가 있다는 믿음에서, 앞으로 고생하고 계신 선배 언니를 위해 시작한 54일 9일 기도에 다녀왔습니다. 병자 성사를 받고 누워 계신 언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버스에서도 묵주를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묵주를 매만지는 손과 더불어 지금 병원에서 투병하고 계신 김신부님의 얼굴일 가득히 떠오릅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혜이겠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분들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 분들을 기억하면서 나는 그 분들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존경하는 주교님을 생각할때면 감격에 겨워 온몸이 떨림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모든 분들께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이 계시기를 기도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속에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도 함께 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변변치 못한 글을 읽으시고 뽑아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통 받는 이들과 서로 나누자는 바람으로만 쓴 글이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지게 되었으니, 송구스러움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낍니다.
주님, 온갖 좋은 것은 당신의 것이오니 저의 기쁨을 찬미와 영광으로 당신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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