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창간이래 68개 성상을 지내는 동안 가톨릭신문은 교회의 바른 의견을 담는 한편 따뜻한 감동과 형제적 사랑 나눔의 메신저로서 그 사명을 다해왔다. 본지는 68회 생일을 맞으면서 지난 수십년간 신문을 통해 보도된 사건들중 아직까지 가톨릭신문의 이름과 더불어 많은 이들 가슴속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그때 그사람 그때 그사건」으로 엮어본다. 77년 한국교회안에 교구와 본당벽을 넘는 이웃사랑의 모습을 결집시켰던 완도본당과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돼 사제적 양심과 신앙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를 찾아 「그날의 사연」과 그후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알아보면서 「교회의 대변자」 「사랑의 교량」으로서의 가톨릭신문 역할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81년 성당 신축한 광주대교구 완도본당
형제애로 핀 신앙의 불꽃 “활활”
신자 20명으로 성당간축 시작
본보 보도후 전국서 상금답지
현재 신자수 1천2백여명 공소 3개
1981년 5월 20일. 이날은 국토 남단의 한 섬 완도에서 꺼져가던 신앙의 불꽃이 다시금 찬란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한 감격의 날이었다. 24년의 역사가 무색하게 존폐의 갈림길에서 잊혀져 가던 완도의 신앙공동체가 비로소 어엿한 본당으로 성숙할 수 있는 터로서 성당 건립을 이룩해낸 것이다.
그해 6월 7일자 가톨릭신문은 그날의 감격을 이렇게 전한다.
「공동체의 힘은 참으로 위대했다. 완도 성당 그것은 자신의 전부를 봉헌, 투신했던 한 사제의 피와 땀과 의지와 파도처럼 밀려온 전국 교회신자들의 뜨거운 사랑이 한데 어우러져 이룩해낸 고귀한 사랑의 승리였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속에」 축성된 완도성당은 바로 「교구와 본당의 벽을 넘은 형제애의 승리」였던 것이다.
지난 54년 해남본당 완도공소로 시작, 20년이 넘는 연륜을 지니고서도 본당승격과 공소전락의 악순환, 주임사제의 잦은 교체, 본당 신자들의 의욕상실 등의 파란을 줬으며 존폐의 위기에 이른 완도본당에 재건의 의욕을 새로 불러일으킨 이가 바로 제5대 주임 김종남 신부.
사목여건의 어려움으로 누구도 부임을 꺼렸던 완도본당에 자원한 김신부는 당시 수술로 위가 정상인의 3분의 1밖에 안되는데다가 십이지장마저 대부분 잘라낸 상태였다. 76년 완도로 부임한 김신부는 그날 저녁 함께 간 여동생과 함께 허름한 창고성당에서 연탄가스에 중독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기껏해야 20여명이 채 안되는 적은 신자수, 그나마도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이들을 앞에 둔 김신부는 암담하기만 한 현실에 바닷가를 결으며 하염없이 조약돌을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의와 절망에 주저앉아있을 수만은 없는 일. 양들을 위해 그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일어서야 했다. 몇달에 걸친 고심끝에 얻은 결론이 성당 건축. 구석진 산비탈에 초라하게 서있던 창고성당을 시내중심가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아니 오히려 내가 쓰러진다면 하느님의 사업은 일어난다는 생각을 했지요. 내몸과 새 성당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했지요」
완도신자들의 힘만으로는 성당건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김신부는 전국을 발이 부르트도록 헤매고 다니며 모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과는 미약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교회언론을 통한 호소였다. 그동안의 분석자료와 함께 장문의 호소를 가톨릭신문에 보냈지만 큰성과는 기대하지 않았다.
77년 3월 13일. 가톨릭신문은 「24년 역사, 존폐의 갈림길에」선 완도본당의 간절한 호소를 1면 톱으로 다뤘다. 성과는 놀라웠다. 보도 다음날부터 신문사와 완도본당으로 지원방법에 대한 문의전화가 빗발쳤고 격려의 편지가 줄을 이었다. 매주 가톨릭신문은 지원금을 낸 은인들의 명단을 싣는 동시에 사설과 기획기사 등을 통해 이 따뜻한 사랑의 나눔을 속보로 알렸다.
신경통약을 사러가다가 약값을 모두 완도로 보낸 주부도 있었고 어린이들이 고사리순으로 모은 저금통을 들고 오기도 했다. 전국의 각교구와 본당에서 한푼두푼 성금을 보내오면서 지원금액수는 순식간에 불어났고 기도운동과 격려서한 보내기도 불같이 일어났다. 교구와 본당의 두터운 벽을 뚫고 솟아오른 뜨거운 형제애를 확인한 완도본당신자들은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매일 저녁 은인들을 위한 2백만단 「묵주의 기도」를 바쳤고 「기필코 성당 건립을 이룩하겠다」고 다짐했다.
전국에서 쏟아진 격려에 힘을 얻은 완동본당 신자들은 마침내 77년 5월 27일 시내에 마련된 5백여평의 대지에서 성전 기공식을 가졌다. 4년간 5번이나 공사를 중단하는 어려움속에서도 국내외 지원 6천2백만원, 교구와 기타 은인들의 성금 등으로 통공사비 8천3백70만원에 연건평 1백71평의 완도본당이 81년 5월 20일 마침내 하느님께 봉헌됐다. 이날 축성식은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완도군민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화제의 대상이었다. 당시로서는 이 지역에서 가장 웅장하고 특색있는 건축물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넉달후 김신부는 완도를 떠났다. 그리고 이상하게 병원에서조차 거의 사형선고를 내리다시피한 김신부는 거의 완전한 건강을 회복했다.
새성당건축과 함께 신앙의 불씨를 다시 되찾은 완도의 양떼들은 더이상 방황하지 않는다. 현재 완도본당은 3개 공소를 포함해 1천2백의 신자수를 헤아리고 주일미사에 5백여명, 평일미사에만도 60여명이 꾸준하게 참례한다.레지오가 8개, 신심단체가 10여개에 달하고 1년에 세번있는 영세식에는 매회 30여명 이상의 새교우가 탄생하고 있다.역대 어느 신부에 못지않은 왕성한 사목활동을 펼치며 완도본당의 미래를 여는 현주임 안성완 신부는 「완도의 잠재력은 매우 크다」고 지적하고 「김종남 신부님은 물론 그 뒤를 이은 여러 선배 신부들과 전체 교회가 불모지 완도에 신앙의 불씨를 피워주었다」며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도록 전국의 교우들을 한데 묶어준 가톨릭신문에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지금부터 20여년전에 펼쳐졌던 이 사랑의 기적은 오늘도 가능하다는 것이 당시의 주역 김종남 신부의 말이다.
「아직도 우리는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농촌에는 양철지붕이 썩어 빗물이 떨어지는 공소들이 많아요. 도시본당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지요. 교구와 본당을 벽을 허물고 도망간 사랑의 나눔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 최기식 신부
“나의 소신 아직도 변함없어”
당시 전교회적 지지성원 “감사”
교도생활계기 사회사업전념
「당시의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교회내적인 결과로 볼 때 사제의 신원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었을뿐 아니라 온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는 계기였습니다.」
한민족의 든든한 우방으로만 생각했던 미국의 공공시설을 대상으로 소위 좌경화된 대학생들이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또한 실정법과 교회법상의 충돌이라는 문제가 처음으로 구체화됐던 점에서 나라 전체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그 사건에 연루돼 국가 보안법 범인은닉죄 등으로 징역3년 자격정지2년의 선고를 받았던 최기식 신부(원주 교구 사회복지위원장). 그는 「광주사태이후 침묵이 강요되는 답답한 상황에서 재판과정을 통해 교회가 보여주었던 일련의 모습들은 일면 국민들에게 신선감을 안겨주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그때 그 사건을 떠올린다.
82년 3월 18일 발생했던 이 사건은 방화로 인해 문화원안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3명을 숨지거나 다치게 하고 1억7천만원의 재산피해를 냈다. 당시 원주교육원을 책임지고 있던 최신부는 방화사건 배후조정자인 김현장을 광주사태 관련자인줄 알면서도 1년10개월동안 숨겨주었고 방화사건의 주범 문부식과 김은숙에게 행한 의식화 학습을 묵인한 협의 등으로 검거됐던것.
본지는 최신부가 검거되자마자 82년 4월 11일자 1면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당시 원주교구장 고 지학순 주교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제적 양심에 따른 소신있는 행동」임을 보도했다.
사건이 알려지고 최신부가 검거되면서 정부와 언론은 원주교육을 용공단체의 소굴로 몰아붙였고 나아가 최기식 신부는 방화의 배후인물로 또는 좌경의식화 교육의 주관자로, 교회는 불온집단의 온상으로 부각됐다.
이에 대해서 고 지학순 주교를 비롯 동료사제단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정의평화위원회 등에서는 각각 성명을 내고 언론을 통한 정부당국의 교회 음해 노력을 지적하였고 「모든이의 모든것」이 되어야 하는 사제의 신원에 대해 신자들의 이해를 구했다.
이때 가톨릭신문은 광주사태 이후 언론통폐합 등으로 모든 매스컴이 「사회의 목탁」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암흑기였음에도 최신부의 재판과정을 세세하게 보도함은 물론 교회의 입장을 표명 사건에 대한 신자들의 바른 해석을 도왔다.
교회법상의 비호권과 실정법상 범인 은닉과의 관계에 대해 논쟁이 들끓자 본지는 4월 11일자 1면 톱기사에서 전문가들의 입장을 정리, 「죄없는 자 보다도 죄있는 자를 보호해야 하는 교회의 근본상격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처리해야 할것」을 강조하는등 법운영의 신축성을 제시했다.
당시 가톨릭대학교 신학부교수였던 최창무 신부(현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담당주교)와의 인터뷰를 통해 가톨릭신문은 「가톨릭교회법은 피신을 요구하는 자는 누구나 받아주도록 돼 있고 따라서 법적 판결전에 피신을 요구하는 피의자를 교회가 받아주는 것은 종교윤리적 측면에서 범법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그이론적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최기식 신부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밝힌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제일 염려했 던것은 교회가 공산주의로 오도돼 손해를 보고 정부로부터 어떤 불이익을 다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끊임없이 교회를 위해 기도를 바쳤다는 최신부, 그는 김현장 문부식의 사형확정을 지켜보아야 했던것이 무척 고통이었다고 덧붙인다.
고 지학순 주교를 비롯 동료 성직자들과 주 20~30회 부산지법을 오르내리며 자신을 변론해준 변호사들, 기도해준 많은 신자들을 생각하면 그때의 기도가 최기식 신부 개인을 위한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해도 「더욱 잘 살아야 할텐데」라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얘기했다.
「그때 실정법상으로 구속 된 이유가 있었다면 광주사태 관련자로 수배중이던 김현장을 은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아도 양심에 가책은 전혀 없으며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문부식 김은숙의 경우 처음 그들의 방화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 일을 알게된 후에도 무작정 보호한 것이 아니라 자수를 권유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신부 개인적인 경험상 그 사건은 「어려운 이와 함께하는 사제적 삶」에 더욱 확고함을 갖게했다. 비둘기와 벗하고 쥐를 20마리씩이나 잡아야 했던 교도소 생활은 묶여있는 이들, 재소자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기쁨을 주었다. 말로만 부르짖는 정의가 아니라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정의를 강하게 체험한 기간이기도 했다.
16개월간의 복역기간을 거쳐 집행유예로 출소했던 최신부는 그 체험을 사회사업 활동에 쏟았다.
현재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는 그는 86년경부터 교구내에 양로원결손가정자녀시설 장애자시설등을 세우고 후원회를 조직, 원주교구 사회복지위원회를 활성화 시켰다. 사회복지 사업에 대한 그의 소신 역시 「장애자들이 가난한 이들안에 깊숙히 들어가 동고동락하고 도와주는 삶」이다.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요즘 몇몇 까마득한 후배 신부로부터 「부산 미문화원 사건때의 신부님 모습을 보고 신부되기를 결심했다」는 소리를 들으며 「참으로 고맙다」는 느낌을 가졌었다는 최신부는 한편 역사의 현장에서 교회의 한 단면을 웅변해주었던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동료사제들이 자신에게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자주 한다고 여담을 들려준다. 「교회가 살아있었던 것 같은 생각에서 그 일이 인상 깊다.」고 말한 그는 한숨처럼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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