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서도 한국에서 귀국한 사람들의 가정, 그리고 아직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하였는데 귀국자중 하나는 현재 사립국민학교 교장으로 재직중이었다. 그는 「누나 저는 한국에 다녀온후로 생활 태도와 생각이 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전에보다 역동적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집을 방문하니 방1개와 부엌이 딸린 아주 작은 집이었는데 이불장도 한국식으로 꾸며놓고 있었다.
한국의 좋은습관 귀감
또 한사람의 지역 유지되는 분을 만났는데 그는 한국에 갔던 사람들과 기타 유럽이나 일본에 갔던 사람들을 비교하여 얘기를 하였다.「독일이나 일본으로 떠난 사람들은 돈보따리를 싸가지고 오지만 한국에 간 사람들은 어떤 다른 것을 갖고오더라. 한국의 좋은 관습, 그리고 부지런한 삶을 배워 오는 것을 보았다」며 한국에 다녀와서 은행의 간부로 복직하고 있는 사람의 예를 들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에 다녀온후로 생활 방식이 100% 바뀌었다. 네팔의 남자들은 직장 일 외에 집에 와서는 전혀 일을 하지 않는데 그는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야채밭도 관리하고 집에는 가내수공업으로 초공장을 만들어서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그들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부끄럽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덧붙이기를 한국사람들은 어른을 섬기는 아름다운 문화를 가졌다고 들었다고 했다. 은행에 복직한 분의 증언인데 그 자신도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여 우대를 받았고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면을 보면서 정말 우리는 이땅에 와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인격체로 존중치 않고 무시한다면 제얼굴에 침뱉기가 될것임을 느끼게 했다.
네팔에서도 여러 친구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중에는 귀국후 철공소를 경영하는 사람, 건축자재상을 하는 사람, 개인택시를 몰고 있는 사람, 또 자기집을 마련한이 등 모두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고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할 수 있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렵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도 만났는데 94년 8월 「한겨레21」에 나왔던 사람중에 몇사람들도 만났다. 그중에는 산재 보상을 받지 못했던 노동자도 있고, 남편이 행방불명된 사람도 있고(철도사고라고 하나 명확치 않다는 이야기도 있다) 심장마비로 자연사되어 돌아온 사람의 가족을 만나기도 했다.
산재인연···세례받아
네팔을 떠나기 전날인 94년 11월 2일에는 한국에서 산재를 당하여 인연이 맺어져 천주교 교리를 배우다가 돌아간 슈렌드라의 영세식에 참석했다. 네팔에서는 교리공부를 보통 1년반에서 3년을 해야 하는데 슈렌드라의 경우 1년밖에 되진 않았으나 한국에서 온 나를 보아 그에게 세례를 받도록 허락하였다. 그는 상담소가 하는 일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누누히 이야기 했으며 이런 기쁜자리에 내가 와 있게 됨을 다시 감사드렸다.
파키스탄에서는 4박5일 있는 동안에 3집에서 지냈고, 아름다운 회교도식 전통혼례식에 참여도 하였다. 나는 우리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화야즈 집에서 이틀을 보냈는데 그의 집은 딸9명에 아들1명을 둔 집안이었다. 시집간 딸3명이 있었는데 모두 근처에 살고 있어서 늘 함께 생활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야즈의 어머니는 병환중에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외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을 애타고 보고 싶어했고 나의 방문에 아들의 체취라도 느끼는듯 좋아하셨다.
아들이 보고 싶어 금방 오라고 하고 싶지만 한국에서 돈을 벌어야 누나들 시집도 보내고, 동생들 공부도 시키니 그럴수도 없다며 애타하였다.
9명 누이 생계책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화야즈 역시 애절하였는데 화야즈의 어머니는 내가 다녀온 1개월후인 지난 12월초에 운명을 달리하셨다. 비보를 받고도 화야즈는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치 못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집에 돌아가봐야 어머니의 장례식은 이미 끝났을테고 직장에도 돌아올수 없는 무거움때문이었다.
이곳에서도 귀국한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지나가다가 산재를 당한 친구를 만나 한국 영사관에서 산재보상을 받도록 안내도 해주었고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안내해주도록 권고하였다. 이곳에서도 가는 곳마다 종교가 다름을 알면서도 가족처럼 반가이 맞이해 주었고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도 해주었기에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청하기도 전에 미리 마련해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다시 고백하고 감사드렸다. 이러한 체험을 하면서 민초인 우리가 오늘 이땅에 들어와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국적, 종교, 인종을 초월하여 사심없이 친구로 맞이하는 것을 이세상에 평화의 주춧돌이됨을 확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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