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본래 그럴 분이 아니셨습니다. 당신의 좋으신 일은 늘 감추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겸손하기 그지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분은 마치 왕이나 되는 듯이 그렇게 광내시며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입성은 그분의 반대자들에 대한 일종의 선전 포고였습니다. 3년동안 전도생활을 하시면서 그분은 반대자와 적들을 많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실 악도 이미 찰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기서 보통 사람이라면 몸을 숨기는 것이 상례이지만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포야, 나 들어간다. 창 받아라」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일의 결과에서 보면 오늘 예수님의 요란한 입성은 우연한 충동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선 아들이 만백성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기를 원하셨는데 그시기가 바로 닥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정된 죽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하나의 각본과 연출이 필요했는데 이를 테면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예수님은 섶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 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합니다. 더구나 나귀를 타고 오시니 예수야말로 그들이 기다렸던 왕, 즉 메시아로 확신합니다. 이제 그들은 새 나라가 세워지리라 믿었으며 로마의 식민지라는 치욕에서 벗어나 자유의 나라, 그리고 경제적으로 부강된 나라가 건설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현세적인 삶을 구하는 메시아를 예수님께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메시아의 역할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백성들의 꿈을 일순간에 깨뜨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으로 바보요 멍청이처럼 보였습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비굴하게 능력을 감추고 있었고 힘이 있으면서도 그 힘을 숨기고 있다고 행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분개를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라」하며 일종의 보복을 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었습니다. 어제의 환영자가 오늘은 배반자가 됩니다. 그들이 예수께 걸었던 화려한 기대만큼 그렇게 예수를 사정없이 짓밟게 됩니다. 「너같은 놈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그들은 판단했으며 그러니까 감히 하느님을 죽이라고 백성들의 의기가 투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죽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인간은 과연 하느님을 죽일 수 있는가. 그리고 죽을 수 있다면 그가 정말 하느님일 수 있는가」. 어쨌거나 우리의 주인공은 죽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기 때문에 역시 인간으로 죽으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하시며 그분은 장담하셨지만 세상이 오히려 그분을 이겼으며 그는 결국 죽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분도 역시 무력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신앙이 과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십자가에서 절규하셨던 아픔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라예보에서의 내전으로 인한 무구한 시민들의 희생과 소말리아에서의 천진한 어린이들의 굶어 죽음은 하느님이 정말 계신지 어쩐지 우리로 하여금 의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니체는 일찍이 「신은 죽었다」고 외쳤습니다. 아니, 자기가 직접 신을 죽였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니체의 살신(殺神)행위는 아무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19세기 당시의 철학과 사상의 풍토는 또 그렇게 니체의 살신 행위를 돕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끝장이요 신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사흘 째 날이 밝아올 때 그분은 여전히 살아 계셨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예수는 죽고 또 죽어 왔으나 그러나 사흘이면 다시 살고 다시 부활해 왔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신을 수없이 죽이고 있지만 신은 죽지 않으며 오히려 신은 그 살신자들을 위해서 오늘도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는 일이란 그저 죽음을 부르는 일이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죽음의 신비를 배워야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고 못난 죄인을 살리기 위해선 선하신 분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서 이웃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웃을 위해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사순절은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삶을 묵상하고 또 내 죽음을 바라보면서 부활을 소망하는 그런 시기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죽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결국 죽음으로 끝장은 아닌 것입니다. 살기 위해 죽고 죽어야만이 산다는 신앙을 새롭게 간직하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오늘 죽음이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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