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참으로 위대한 날입니다. 교회 전례로 봤을때는 오늘이야말로 일년중에 가장 크고 높은 날입니다. 예수성탄이 기쁜것도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이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이유도 바로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이 있음으로해서 세상은 그 의미를 가지며 인생은 그 삶의 보람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온갖 선과 악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은 명쾌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세상은 진정 죽음으로 끝장이 아니었습니다. 악한 사람이 아무리 잘 먹고 세도 부리며 떵떵거린다해서 절대로 부러워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저편에는 다른 세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실 죽음에 대해서는 아주 깜깜했습니다. 안보이니까 더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안으로 들어가셔서는 죽음의 휘장을 걷어 내시고 보니 그 뒤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너무도 소망스럽고 너무도 행복한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인류에게는 참으로 큰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인류는 이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영원한 삶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어린 딸을 잃고는 너무나 슬퍼했습니다. 딸은 너무도 예뻣고 영리했으며 또 착했습니다. 죽을 이유도 없었고 부모가 또 악하게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딸은 교통사고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세상에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녀는 참으로 분하고 원통했습니다.
세상과 하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자 그 자매는 더욱 괴로왔습니다. 삶 자체가 저주요 원수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녀님이 우연히 찾아와서는 딸은 필경 다시 부활하여 하느님 곁에 편하세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엄마는 수녀님의 말씀에 너무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어둡게 닫혔던 세상이 활짝 열렸으며 죽은 딸에 대한 희망 때문에 그녀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실로 예수님 때문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망가지고 부서지고 파괴되었던 모든 요소들이 이제 제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땅은 축복받은 땅으로 변화되었으며 심지어는 고난도 죽음도 다 은혜로 축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세상을 건져 주셨습니다.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그 열쇠였습니다. 부활이 그 해답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저주였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다』(신명21,23:갈라3,13)라고 성서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후로는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혼자 다 뒤집어쓰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믿지않는 이들에겐 십자가는 부끄러움이요 저주이지만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십자가는 진정 하느님의 힘이요 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죽음 속을 들어가셔서 죽음의 저주를 다 깨뜨리셨기때문에 죽음도 이제 은혜가 됩니다. 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원래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적이요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 속으로 들어 가시니까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생의 끝장이 아니요 새 삶을 열어주는 관문이요 또는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부활뿐만 아니라 우리는 정신의 부활, 생활의 부활, 그리고 마음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할 때가 있고 알게 모르게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람은 어떤 의미로든지 죽어봐야 새롭게 태어납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루가 15, 11~32)에서 작은 아들이 알거지가 된 후에야 새 인생이 되었던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형제가 자기 동료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 동료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자기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면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후로도 계속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할수만 있으면 복수를 하고 싶었고 그 동료를 생각만 해도 밥맛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기도회에서 그 형제는 미움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내적 치유를 인도하시던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우리에게 이미 누군가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 주는 것이 올바른 치유의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자기 동료를 위해 기도함으로 해서 자기가 오히려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건너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새삶의 세계를 열어 주시어 닫혀졌던 세상의 모순을 풀어 주셨기 때문에 세상은 이제 절대로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부활의 위대한 새벽을 늘 바라보도록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참 미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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