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오늘은 온 세상의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특별히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올해는 민족이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은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있어 해방 50년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살아온 분단 50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의 우리에게 민족의 해방과 해방된 민족의 미래를 함께 생각 해 보기를 요청하십니다.
출애굽이 주는 교훈
민족의 해방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통해 자유를 찾고 가나안 복지에 이르는 과정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파라오의 폭정에서 탈출한 이후 40년이 지나도록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헤맸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방황한 까닭은 참된 해방자이신 하느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참된 해방을 위한 교육의 기회가 되었고, 이 시련의 기간을 거쳐 그들은 마침내 해방의 땅에 들어 갈수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은지 5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우리 민족은 동족 상잔의 쓰라림과 분단의 고통 속에서 참된 해방을 누리지 못했고. 이 시련의 신간을 진정한 해방을 위한 준비의 기회로 삼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대의 우상인 물질지상주의와 특정이 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분열되고 상처입은 민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빠스카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로 물든 인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으로 믿은 이들은 연약함에서 능력을 수치와 모함에서 영광과 영예를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해방자 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류의 죄를 사해주시고, 화해의 모범이 되셨으며, 진정한 평화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진정한 화해와 일치
오늘날 민족 구성원 가운데 상당수는 새로운 우상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적 소명을 부여 받은 그리스도인 마저도 민족 공동체의 진정한 화해와 구원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분단에 안주하여 형제를 단죄했으며 민족 공동체와 인류의 구원보다는 우리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데에 머물렀습니다. 우리의 귀와 눈은 이기심과 우월감, 적대의식과 의구심에 가리워져 진리의 원천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반성을 기초로 하여 우리는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위해 새로운 역사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존재 이유를 확인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할때, 우리 사이에는 진정한 대화가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 존재이유의 긍정을 통해서 서로는 흡수통일 또는 적화통일이라는 유혹으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동안 역사와 문화를 고유하고 동질성을 간직해 왔습니다. 우리가 서로 고유하고 있는 동질성은 우리 민족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원동력이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남북한의 민족구성원 모두는 비록 서로의 차이점을 발견하더라도 이를 강조하여 이질성을 심화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릐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장점을 인정할때 그것은 민족구성원 모두의 장점이 되어 민족사 발전에 도움이 될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 자존심으로 고유하면서,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을 굳건한 의지를 함께 키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발전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우리 민족의 공동자산으로 삼고 근면하고 활가찬 삶의 방법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이었던 빠스카의 의미를 새롭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신비는 우리 민족의 참된 해방의 길과 미래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해방의 희생양이셨습니다. 빠스카의 어린 양처럼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주신 그리스도는 우리 인류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시고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진정 우리의 해방자이시고 평화이십니다(에페2.10 ∼14참조).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시면서 서로 죄를 용서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요한20.19∼23참조). 그 가르침대로 제자들은 한 마음, 한 뜻이되어 사람과 믿음으로 가득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사도 2장 참조). 이제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그저 하루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여 주셨던 무조건적 용서와 사랑을 우리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광복50년은 분명 희년(禧年)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류의 희년, 참된 구원과 해방을 위해 그리스도의 희생이 요구되었듯이 참다운 희년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보다 깊이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요구되는 자기희생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각과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키워가야 합니다. 사치를 버리고 검소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불신을 신뢰로 바꾸고 미움을 사랑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의 고통까지도 함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처럼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밀씨가 되어야 하며(요한12.24참조)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그 가장 큰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요한15.13참조). 바로 그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을 밝히고 우리 사회를 밝히고 온 세계를 밝히는 광명,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우리 안에 떠오를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본 받은 그 사랑과 희생이 우리 사회의 지역간 계층간 또는 세대간의 격차의 담을 헐고 마침내 50년 남북분단의 벽을 허물어 통일을 가져오는 해방의 힘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세 이같은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1995년 예수부활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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