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절 식사 즉 예수의 최후만찬 후의 제자들과의 담소시간은 퍽이나 침통한 분위기였다. 예수자신이 몇 시간 안남은 죽음을 앞에 두고 몹시 침통스러웠다(요한 13, 21).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이 더욱 사랑스러웠다(요한13, 1).
죽음은 사탄의 세력권에 속한 것이며 당신이 죽은 후 실망에 잠길 제자들이 또한 사탄의 세력과 싸워야 할 것을 내다 보시며 그들에게 격려와 안심시킬 만한 약속이 필요하였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뿐이고 믿음은 그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도록 제자들을 훈련시켰지만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자신이 일체이시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재촉하시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얼핏 사탄의 승리처럼 보일 것이나 실은 그 죽음이 예수의 승리라는 것을 그들은 깨달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내가 떠나는 것을 몹시 애통해하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가면 너희가 있을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겠다」
그들은 집없이 여지껏 스승 예수를 따라 다니다가 예수를 잃고 허탈해 지겠지만 앞으로 아버지의 집에 충족한 있을 자리를 분양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두 가지를 알아 들었을 것이다. 하나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자는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며(마태 10, 39)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12, 25)라는 주님의 말씀이고, 둘째는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안에 살아 계시고 예수는 아들로서 아버지 안에 살아 계시다는 묘리이다.
예수님의 삶의 본터가 하느님의 생명이고 그곳이 예수의 거처이다. 거기에는 제자들과 예수를 위하여 목숨바친 모든 믿는 자들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무릇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니 예수께서 성경말씀대로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야 하지만 제자들은 동요할 것이 하나도 없다. 가셨다가 다시 돌아와 그들을 하느님의 거처로 데리고 가실 것이라는 약속을 덧붙이셨다.
전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가겠지만 제자들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에는 아직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려 주시지 않은 때였다(요한13, 33).
그러나 이제는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라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곧 다시 돌아와서 제자들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니 제자들이 갈길은 믿음을 굳히는 길뿐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사태파악을 완전히 못하고 있다. 토마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토마는 아라메아어 이름으로 「쌍둥이」라는 뜻이며 그리스어로는 「디디모」라고 하여 후대에는 쌍둥이 토마 또는 디디모 토마라고도 불렀다.
그는 예수께서 수난을 예고하실 때 나서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자」라고 외쳤던 사람이다(대목 258참조). 그가 오늘은 또 나서서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대답하셨다. 우리가 갈 곳은 하느님의 집이다. 거기에 가려면 예수를 따르면 된다. 하느님이 곧 진리요 생명이시니 그분과 하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자신이 진리요 생명이시다.
지금 제자들은 옳은 길에 들어섰고 진리와 생명과 대면하고 있다. 제자들은 언젠가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6, 46)라는 말씀을 상기했어야 했을 것이다. 지금 「너희는 나를 알았으니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며 이미 그 분을 뵌 것이나 마찬가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12사도중 이론자로 통하는 필립보가 나서서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말씀으로 답하셨다. 「나는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뵙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전에도 말했 듯이 내가 하는 말과 일은 나의 말이 아니고 내가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뜻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내재성(相互內在性)의 교리를 굳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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