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교리반에서의 일입니다. 5학년 남자아이가 혼자서 키들키들 웃더니만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수녀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때 천당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대하여 교리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꼬마가 질문을 했습니다. 『수녀님, 천당은 양로원과 똑같겠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수녀님이 『왜?』하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천당은 늙고 병들어 죽어서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이빨 빠진 할머니, 머리가 벗겨진 할아버지들만 사시잖아요. 그러니 저는 천당에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막 웃었습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런 것 같았고 수녀님의 교리지도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교실 안이 한참 어수선할 때 조그만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만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너희들은 그런 것도 모르냐?』하면서 나무라더니 천당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한 분도 계시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네가 어떻게 아니?』하고 대들었습니다. 이때 소녀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내용은 그랬습니다.
파티마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이나 루르드에서 발현하셨던 성모님은 다같이 젊고 예쁜 부인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성모님은 일흔이 넘어 돌아 가셨지만 그러나 천당에서는 살아계실 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신다고 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그분들 생애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천당에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거기서 탄복을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발현하셨을 때의 성모님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면 그분은 분명히 아주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분명히 그렇게 부활할 것이며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느님 대전에서 존재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세상에서 잃었던 부분은 거기서 다 찾을 것이며 미완성이었던 모든 것은 거기서 완성을 이룰 것입니다.
세상은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즐겁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불구자, 가난한 병자로 세상을 고통스럽게 산다해도 그는 분명히 하느님 나라에서 보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삶 자체가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어떤 소년이 있는데 그는 신체적 불구뿐만 아니라 부모가 그를 버렸다는 아픔의 상처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소중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했으며 손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종일 엎드려 지내는 세월이지만 입으로 책장을 넘기며 성서를 보는 일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만일에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은 정말 엉망이 됩니다. 막말로 개판이요 요지경이 됩니다. 세상은 그리고 세상 끝까지 언제나 미완성입니다. 완전을 향해 전진하고 있지만 그러나 완성은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계속 악화되어 가고 있고 미래를 닫아놓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래서 불행에서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는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사시어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토마스만 빠진것을 보면 그는 아마 믿음의 일을 제치고 다른 살 길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히 쏘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헛탕을 치고 우연히 제자들에게 왔을 때 그는 실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억지를 부리고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하고 자기 손으로 주님의 상처에 넣어 봐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토마스는 어떤 의미에서 순진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거부감은 오히려 그가 강하게 믿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이 다시 사시기를 기대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토마스는 소원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소원도 성취시켜주었습니다. 강하게 믿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었으며 우리의 불안을 제거시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행복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 때문에 부조리의 세상에 대한 해답이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실로 가슴 두근거리게 기쁜 일입니다. 지금 여기서 어쩔 수 없이 고생한다 해도 그 나라에서 다 보상받을 일을 생각하면 세상이 더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합니다. 따라서 정말 복되게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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