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무엇보다 전쟁특유의 파괴성으로 우리 교회와 신자들에게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한국전쟁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 발발한 가장 대규모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은 내전으로 개시되었지만 내전상황을 윤활유로 하여 이내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이 전쟁으로 남북한에서 3백만명 이상이 사망했고, 전쟁으로 인해 불구가 된 사람, 가족과 헤어진 사람, 고향을 잃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전쟁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얼마 안되는 생산시설을 대부분 파괴해버렸다. 승자와 패자도 없는 전쟁은 민족 전체에 쓰라린 상처와 허탈감만을 남겼다. 나아가 이 전쟁은 수많은 교회 시설들을 파괴했고, 수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 신자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북한지역 교회 완전 소멸
한국전쟁 직전과 과정에서 북한지역에서만 모두 70여명의 성직자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북한지역의 교회들은 이 전쟁이 끝난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남한 지역에서는 본당을 지키라는 교구장의 지시에 성실히 따른 많은 성직자들이 수난을 당했다. 박해시대 이래 이처럼 많은 희생자를 삼켜버린 사건은 일찌기 일어난 적이 없다.
또 많은 교회기관들이 전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기능이 중지되었다. 「천주교회보」를 제외한 교회정기 간행물들의 발간이 중단되었고, 대구교구연맹을 제외한 가톨릭운동조직들도 기능이 마비되었다.
전쟁은 대규모의 인적이동과 교체를 동반했다. 수만명의 북한지역 신자들이 전쟁기간 동안, 특히 1.4후퇴시기에 고향본당을 떠나 서울, 부산 등 남한의 대도시들로 내려와 정착했다. 관할지역이 없는「망명교구」들도 생겨났다. 세상을 떠난 신자들의 자리를 전쟁기간 동안 입교한 새신자들이 메우게 되었다. 전쟁 쌍방간의 밀고 당기기가 반복되는가운데 교회장상들이 피난 지로 향함에 따라 교회의 중심도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납치되거나 세상을 떠난 교회지도자들이 다른 이들로 교체되었다.
이 3년여의 곤고(困苦)한 시간동안 우리교회의 삶은 어떤특징들을 보여주었는가. 무엇보다「전면적인 참여주의」가 전쟁시기를 지배했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세속사회에 대한 교회의 관계는 일제후반의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참여에서 벗어나 전면적인 개입주의로 변했다. 한국전쟁기에 이르면 천주교의 사회참여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며, 다만「교회가 어떻게 전쟁의 승리에 기여할 것인가」하는 방법론만이 문제시되었다. 천주교의 사회참여는 참전(參戰)뿐 아니라 1952년의 지방의회 및 총선거에 대한 교회차원의 정치적 차명까지 포함하는「전면적인」것이었다.
신앙위한「십자군 전쟁」
전쟁중에 전개된 교회의 사회참여는 물론 반공주의와 반공투쟁을 골간으로 삼았다. 서울교구에서는 전쟁 열흘전 부터 보름간 예정으로 북한교회를위한 기도회를 전개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남북한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자연스럽게 남한쪽에 가담하게 된다. 한국천주교회가 반공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고 1930년대를 거치면서 교리수준으로 격상되지만, 일제시대의 반공주의는 순교담론이나 성모담론과 긴밀하게 접합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반공담론이 여러 반(反)근대주의 담론들과 혼합되어 메시지의 초점이 여러갈래로 분산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반공이데올로기의 위치는 한층 격상되고, 반공이 데올로기의 여타담론들에 대한 포섭력이 급격히 증대됨으로써 거의 모든 담론이 반공과 관련되고 그것을 지향하게 되었다. 담론의 초점은 반공으로 집중되었고 그 메시지도 보다 명료하게 변했다. 전쟁기간 중에도 이 기본틀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반공담론이 극도로 전투적인 것으로 변하고, 순교신심 및 성모신심운동과 더욱 긴밀하게 결합됨으로써 신자들의 행위를 동기화하는 힘이 크게 증대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당시 교회지도자들은 전쟁의 원인과 성격을 반공주의의 견지에서 명확히 구정했다. 전쟁발발후 최초로 간행된「천주교회보」에서 서올교구의 노기남 주교는「형제살상의 비극적 전란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무신론 공산주의 침략자들의 마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후 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는 이를 좀더 명료하게 표현했다. 한국 전쟁은「양을 가장한 일회의 아편에 중독된 동족 아닌 동족이 가능한 온갖 악마적 방법을 다하여 빚어낸 참극」이다. 또 한국전쟁은 크레믈린과 바티칸 사이의 세계적 범위의 투쟁이 폭발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장면은 미국의 천주교신자들에게「한국에 있어서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는 지방적 원수가 아님」을 역설했다. 공산주의 세력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또하나의「유사(類似)종교집단」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이 세력이 도발한 한국전쟁은「천주와 교회에 대한 도전」이자「무신론 폭군에 대한 신앙자유수호의 십자군전쟁」으로 규정되었다. 천주교회는 전쟁동안「투쟁의 교회」가 되도록 요구되었다. 노주교는「신자여, 멸공에 총궐기하라」고 지시했고, 천주교는「순교의 정신으로써 이 전쟁에 요약출전하라」고 지시했다.
사상전 (思想戰)성격 강조
그러나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우리교회는 한국전쟁에서「사상전 (思想戰) 」의 성격을 강조했고, 천주교회가 전쟁에서 맡아야 할 역할을 사상전, 심리전, 문화투쟁, 문화공작 등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전쟁동안 천주교 신자들이 사상전이나 문화투쟁만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황해도 지역에서 활약한 구월산유격대의 모체가 된 가톨릭십자군 유격대, 전주교구내부안, 완주, 진안군 등지에서 발견되는 천주교자치방위대 움직임, 김동한 신부 등이 추진하던 3천여명 규모의 가톨릭청년결사대 결성시도 등은 일부에서나마 천주교신자들이 적극적으로 무장투쟁에 나섰음을 보여준다. 전체교회차원에서「청년학도여 국문으로 나아가라」는 요구도 적극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기간동안 우리교회의 삶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또다른 측면은 국가와의 긴밀한 협조관계유지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공산측을 단죄하는 공식적인 언명을 수차에 걸쳐 행했고 전쟁초기에 외국에 체류하고있던 노주교는「주교대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자유진영국가들의 지지와 협조를 얻기위해 분망했다. 교회는 미국신자들이 보내온 막대한 구호금품을 정부기관을 통해 분배했고, 한국정부는 감사장으로 답례했다.
한국 정부는 스펠만 대주교가 방한할때 중앙청광장에서 서울시민환영대회를 열어 국빈대우를 하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통일촉구궐기대회 등을 열어 이승만 정권의 휴전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한국전쟁기간동안 국가와 교회간의 관계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군종제도가 확립된 사실이다. 더욱이 종교적 다수세력인 불교나 천도교를 배재한채 개신교와 천주교만으로 군종제도를 출범시켰다는 사실자체가 당시의 지배세력과 천주교회의 각별한 유대관계를 잘 보여준다. 포로수용소나 공립병원에서의 전교활동 역시 개신교와 천주교에만 허용되었다. 전쟁이 나자 신학생들이 신학대학장의 인솔하에 일제히 입대하기도 했다. 1952년 봄부터 부산정치파동과 장면의 대통령출마 포기선언 등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과의 유대가 손상될 조짐도 나타났지만 아직은 뚜렷한 추세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반공주의로의 격정적인 경도, 국가와의 강한 유대등의 현실은 한국교회의 사회개혁의지를 후퇴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점은 1950년과 1953년의 교구장공동교서를 비교해 보면 분명히 확인된다. 전쟁 말엽에 발표된 1953년의 교서는 전쟁직전에 발표된교서에 지해 사회참여에 대한 촉구가 생략되어 있고, 제도개혁의 의지가 약화되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진 반면 계급간의 협조를 한층 강한 어조로 언급하고, 애국(愛國)에대한 요구를 추가하는 등 전반적으로 개혁의지를 후퇴시켰다. 또 전쟁기간중에 수행된 토지개혁에 대해「반(半)공산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것이라는 비판이 교회 일각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우호태도 강화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계기로 한국교회의 미국우호적 태도가 극적으로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은 한국 교회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 미국 천주교회가 프랑스나 독일의 천주교회를 능가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같은 변화에는 전쟁기간중에 한국에 대한 미국천주교회의 헌신적인 원조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쟁기간 중에 미국의 각종 종교단체로부터 한국에 보내진 구호물자의 약 70%가 미국 천주교회의 몫이었고, 이를 액수로 환산하면 1천 1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막대한 양이 었다. 이 구호물자를 활용한 교회의 자선활동은 한국인들을 천주교회로 끌어들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주교들과 신자들은 전쟁중에 은인인 미국천주교인들에게 여러차례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전쟁 말엽에는 미군과 함께 한미연합 성체대회를 거행하는가 하면, 주교들은 교서에서 종교와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사례로 미국 대통령을 인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전쟁시기의 교회의 삶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봄으로써 미래지향적인 교훈을 얻어낼 수 없을까? 한국전쟁기의 교회사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성찰의 주제를 제기한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민족과 교회」라는 주제이고, 다른 하나는「전쟁과 교회」라는 주제이다. 저자는 종전까지는 공포속에서 강제적으로 외삽된데 불과했던 분단이데올로기, 반공이데올로기가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 주민들 가운데 내면화 되고, 북한주민들에 대해서도 동족보다는「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이미지를 갖게 됨으로써 전쟁이 민족분단을 고착화하고 완성하는 역사적 계기로 작용했다는 사실과 관계된다. 전쟁을 통해 우리 교회는 민족분단이 초래할 온갖 고통과 낭비를 예견하고 민족의 삶안에 육화될 수 있는 통찰들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는가? 후자는 한국전쟁이 지금까지 우리교회가 경험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 참혹한 전쟁을 직접 겪으면서 평화를 위한 교회의 역할을 어떻게 정립하였는가?
「분단질서」무의식적 수용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교회는 두 문제 모두에 올바르게 대응하는데 실패한듯 보인다. 한국교회는 이 문제들을 동일한 논리에 입각하여 이해했다. 그것은 말하자면「양진영관(two-camp image)에 입각한 십자군전쟁의 논리」였다. 이 논리에 따르면 무신론세력이 물리적으로 소멸될때까지 평화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한에서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던 것이 무신론 세력에 대한 유신론세력의 승리였듯이 한국전쟁은 보다 격렬한 형태로 계속되는 무신론세력과 유신론 세력간의 투쟁이었다. 이왕 전쟁이 터진 이상 유신론세력의 선봉인 교회는 가장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과정이 보여주듯이 이 논리는 냉전질서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흑백논리와 너무나 친화적이어서 우리 교회가 냉전질서와 그 파생물인 분단질서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사회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민족의 분단이 신앙의 승리였고, 민족의 재일치와 평화는 북한 공산세력을 물리적으로 분쇄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을까?
7.4성명후 평화강조
돌이켜 보면 우리는 교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몇몇 전쟁을 겪으면서도 전쟁과 평화문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정립하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한국에 진출한 선교사들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빚어졌던 적이있었다.
일제지배 말기에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라는 두 큰 전쟁에 휘말렸던 우리 교회는 황군(皇軍)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미사를 바치고, 군기헌납운동, 금속품 헌납운동, 부녀들의 놋그릇 모으기운동, 비행기헌납운동 등 병기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대망의 징병세」를 크게 환영하면서 신자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원병 모집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국」에서「반공」으로 명분만 달라졌을 뿐,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때에도 우리 교회는 열심히 전쟁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또 두 경우 모두 전쟁참여 행위가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영성적 전통의 하나인 순교신심과 적극적으로 결합되어, 전쟁에 희생된 신자들이 순교자로 추앙되었다. 나아가 한국전에서는 전쟁이「인류를 타면(惰眠)에서 각성시키고 이를 이끌어 진지한 건설과 진보에로 향하게 한다」는 전쟁예찬론까지 교회안에서 등장했다. 「철저한 말살의 신념을 갖고 남보다 맹렬히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전쟁을 힘겹게 견디고 있는 신자들에게 내려진 것도 이때였다.
1970년대 초의 7.4공동성명을 계기로 우리 교회는 (멸공)전쟁보다 평화를 강조하는 전환을 이루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판단이다.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통해 평화에 대한 갈망을 더욱 다듬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전쟁을 불의한 것으로 단호하게 단죄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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